[도서] 2018 제 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나는 뷔페가 좋다. 한식, 양식, 중식, 일식을 입맛대로 골라먹을 수 있는 뷔페가 좋다. 마지 못해 참석한 지인의 결혼식에서 뷔페가 아닌 코스요리라도 나오면, 나는 시무룩하다 못해 참담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정갈한 정식이나 코스요리가 땡기는 날도 있지만, 대체로 나는 뷔페를 선호하는 편이다. 다양한 주방에서 다양한 재료, 다양한 조리법으로 만든 요리를 한 접시에서 맛보는 것은 뷔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뷔페같은 책이다. 여러 작가가 각기 다른 소재와 주제의식을 가지고 집필한 단편소설들이 실린 책이다.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에서 마주한 고급 뷔페만큼이나 반갑고 즐거운 책이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작가들의 약력이다. ‘젊은 작가’로 구분되는 것은 몇 살까지일까? 나름대로 ‘작가’를 지향하고 있는 나로선 꽤나 궁금한 점이었다. 85, 76, 83, 83, 87, 74, 88. 음 이 정도면 나도 아직은 ‘젊은 편’이겠구나 하고 안도했다. 책 뒤쪽에 실린 심사 경위를 보니,

젊은 작가상은 등단 십 년 이하의 젊은 작가들이 한 해 동안 발표한 중단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선정한 것이라고 한다. 아마 문단에서의 젊음과 늙음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닌 등단 햇수를 기준으로 매겨지는 듯 하다. 하긴 그렇지. 젊음과 늙음의 기준이 생물학적 연령이 되어서는 안 되지. 나는 주최 측의 혜안에 감탄했다.

세 여성의 문화적, 역사적 인식 차이를 다룬 <세실, 주희>에서부터, 자본에 잠식된 미술계를 풍자하는 <회랑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행운과 불운의 균형과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들의 이해관계>, 존엄사에서 대해 담담하게 풀어낸 <더 인간적인 말>, 소비자를 기만하는 바이럴 마케팅을 비판한 <가만한 나날>, 불편한 가족관계를 초현실적인 묘사로 그려낸 <한밤의 손님들>, 남다른 성적지향을 가진 영화인의 이야기를 재치있는 입담으로 풀어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 이르기까지,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일곱편의 중단편은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과 주제의식, 재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 입맛에 가장 맞았던 것은 임현 작가의 <그들의 이해관계>로, 사소한 일상이 거대한 참사로 확장되는 전개와 주제의식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갈등상황 및 그 갈등의 해소 과정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나 자신 혹은 내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라는 점에서 가장 공감이 많이 되는 소설이었다. 본편만큼이나 후기도 재미나게 적은 작가도 있었는데,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의 임성순 작가였다. 본편에서의 속도감있는 전개와 묘사도 일품이지만, 후기에서의 입담은 그야말로 토크쇼를 방불케한다.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소설과는 별개로, 수록작 중 가장 독특한 향취를 풍기는 작품은 박상영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였다. 동성애와 영화, 군대, 노래방 등등 다소 이질적인 소재들을 줄줄이 엮어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작가의 솜씨에 경의를 표한다. 이 외에 다른 작품들에도 나름의 감상과 해석을 주렁주렁 달아보고 싶지만, 책 말미에 수록된 심사평들을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구나 하는 정도를 넘어 왠지 그러면 안 될 것같은 기분마저 든다. 그러므로 굳이 하지 않겠다.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젊은작가상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이다. 맙소사 벌써 9회째라니. 여유가 될 때마다 이전 수상작품집도 찾아보려 한다. 앞으로도 이런 종류의, 젊은 작가들을 위한 제전이 확장되고 또 활성화되길 기대한다.

[도서] 여행하는 인간 (Homo Viator)

내가 대학교에 진학하던 무렵, TV에서는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청춘 시트콤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시트콤에서 그려진 대학생들의 일상은 그야말로 낭만 그 자체였다. 근사한 곳으로 놀러다니거나, 예쁘고 잘생긴 친구들을 만나 삼각관계에 빠지거나, 어쩌다 힘든 일이 생겨도 친구들의 우정으로 으쌰으쌰하며 이겨내는, 그런 달콤한 것이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 내게도 저런 일들이 벌어지겠구나 싶었다. 현실을 깨닫는 데는 입학하고서 한 학기가 채 걸리지 않았다. 일단 과제가 너무 많았고, 과제 외에 신경써야 하는 학교 행사도 많았고,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나가는 지출도 많아졌다. 1학년을 마칠 무렵, 나는 TV에 나오던 선남선녀들과 달리 구질구질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2학년이 되니 상황은 한층 심해져, 과제는 더 많아졌고, 어쩌다 보니 학생회 일까지 맡게되었다. 점점 늘어나는 지출을 감당할 수 없어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시작해버린 이상 중도에 쉽게 관둘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망가져가고 있었다.과제는 간신히 제출만 하고 있는 수준이었고, 학생회 일은 엉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르바이트라고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여기 저기 분주히 뛰어다녔지만, 실상 뭐 하나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없었다. 육체적 피로에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해, 나의 심신은 만신창이였다. 빠쁜 일상 속에서 나는 서서히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고갈되어 가던 그 해의 학교는 개교 60주년을 맞아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 한가지는 해외 자매결연 학교에 학생들을 보내 교류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해당 프로그램에 선발되기 위해서는 팀단위의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거쳐야 했다. 자매학교 교류 프로그램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해외여행을 학교에서 보내준다는 말과 다름 없었다. 당연히 경쟁이 치열했다. 우리 단과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학과 복도를 거닐면 여기저기서 팀원 모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미 지쳐있던 내게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었다. 해외여행같은 건 이제껏 가본 적도 없었고, 만약 가게 되더라도 당장 내 앞에 놓여진 일들이 신경쓰일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친하게 지내던 동기 누나가 지나가듯 ‘우리 이거 지원할 건데 관심있어?’하고 내게 제안했다. 난 멋쩍게 웃으며, ‘그거 괜찮겠네요.’라고 대답했다. 내 딴에는 완곡한 거절 내지는 보류의 의미로 했던 말이었다. 어차피 당시엔 구상단계였을 뿐이고, 차후에 인원을 확정할 시기가 되면 나한테 다시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다.

이미 그 시점부터 난 그 팀에 포함되어 있었고, 팀의 다른 사람들은 내가 팀에 들어간 상황을 전제로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내가 대답했던 시점으로부터 일주일 가량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학생회 일을 떠맡았을 때도, 다른 사람이 하던 아르바이트를 넘겨받을 때도, 이렇게 애매하게 우물쭈물하다 넘겨받기 일쑤였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했던 나의 고난들은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거절해야 할까?’라고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고 마감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차피 마감이 얼마 안 남았으니 프레젠테이션 때까지만 열심히 도와보자고 생각했다. 다행이었던 것은 우리 팀에서 리더격을 맡고 있던 두 복학생 형들이 전년도 학생회 멤버였다는 것이다. 형들은 나의 고충을 이해하고 많이 배려해줬다. 덕분에 우리 팀은 큰 불화없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수 있었다. 만약 프레젠테이션이 잘 되서 해외여행을 준비하게 된다면, 이래저래 골치 아파질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일단 되고 나서 고민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만 통과해버렸다.

순간 들었던 생각은 ‘어쩌지?’ 였다. 학생회 일은? 아르바이트는 어쩌지? 계획에 없던 새로운 상황이 또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일단 이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기뻐하시며, 잘 다녀오라고 하셨다. 기뻐하시는 부모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걱정할 일이 아니었구나. 기쁜 일이었구나. 그냥 잘 다녀오면 되겠구나 하고.

그렇게 나의 첫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어보고, 국제 학생증을 발급받아보고, 항공권을 끊어봤다. 공항 리무진은 기대와 다르게 버스처럼 생겨서 실망스러웠지만, 처음 가본 인천 공항은 매우 넓고 쾌적했다. 우리가 찾아갈 자매학교는 핀란드의 UIAH라는 학교였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디자인 학교라고 한다. 우리의 계획은 이 학교를 방문하는 김에 사비를 좀 더 보태어 스웨덴, 노르웨이까지 구경하는 것이었다. 20여일의 일정이었다. 당시엔(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핀란드로 가는 직항 항로가 없어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서 가야 했는데, 그러다보니 헬싱키까지 가는데만 17시간이 걸렸다. 상당히 긴 비행시간이었지만, 난 첫 비행의 흥분감에 한 시도 잠들지 못했다. 창가에 앉아 하늘을 보다 그림을 그리고, 다시 하늘을 보다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뭐 그랬다. 그렇게 17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우리들은 북유럽에 첫 발을 내딛었다. 헬싱키에서 7일, 스톡홀름에서 3일, 오슬로에서 3일, 보스에서 3일, 다시 헬싱키로 돌아와 3일을 보내는 일정이었다. 여행지에서도 복학생 형들은 곧 군대 갈 놈이 불쌍하다며, 나를 많이 챙겨 주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돌이켜 보면 더더욱 고마운 일이었다. 크고 작은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지만,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단연 프람행 유람선에서 보았던 피요르드 해안이었다. 그곳에는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북유럽만의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멍하니 경치를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어떤 이야기가 떠올랐다. 프람에서 기차로 갈아타 보스로 향하는 동안, 나는 유람선에서 떠올렸던 이야기를 여행일지에 적어보았다. 신기하게도 막힘 없이 단숨에 이야기가 나왔다. 해와 달에 관한 동화였는데, 지금 보면 다소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나름 그럴듯한 이야기였다.(사실 난 지금도 이 이야기가 매우 맘에 든다.) 처음해보는 경험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제 내가 더 이상 고갈되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때 내가 경험했던 20여일의 여정은 온전히 그 순간만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행하는 인간 (Homo Viator)>을 읽는 내내, 나의 첫 해외여행이 생각났다. 책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하면, 그저 요새 유행하는 여행 예찬 도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타 다른 여행 도서와 다른 점이라면, 저자가 자신의 전공을 살려, 여행의 심리학적 의미를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내가 처음 여행을 떠났던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그 당시의 나를 진단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정말로 적절한 시기에 여행을 갔었구나, 나와 함께 여행을 갔던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구나,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이러이러한 것들을 얻었겠구나, 하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근 10년 만에 당시에 작성했던 여행일지를 꺼내 보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뜬금없지만, 일지를 작성해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 대한 긴 썰을 풀고 나니, 몸이 근질거린다. 슬슬 다시 여행을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영화] 미스터 노바디 / [소설] 버스데이 걸

소설가 김연수는 자신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과거 = 안다, 현재 = 산다, 미래 = 모른다’ 라고 이야기했다. 즉, 삶이란 ‘모른다’에서 ‘안다’로 가는 과정이라는 이야기다.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라는 단어는 ‘가능성’의 유의어 내지는 동의어로도 활용된다. 우린 그 가능성 때문에 매순간 선택의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그 가능성이 최상의 형태로 발현되도록 틈날 때마다 소원을 빈다.

<미스터 노바디>의 주인공 니모 노바디는 천사의 실수로, 미래를 기억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을 앞두고 양친 중 누구를 따라갈지에서부터, 어느 여성을 배우자로 택할 것인지. 그 외에 크고 작은 부수적인 선택지에 이르기까지, 노바디는 자신에게 닥칠 수많은 경우의 수와 그 결과를 미리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알 수 있게 된 시점에서 그것은 더 이상 미래가 아니며 가능성 또한 남지 않게 된다. 결국 노바디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하던 시점으로 돌아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양자택일의 미래가 아닌 제3의 길을 향해 달려나간다. ‘모른다’에서 ‘안다’로 향하는 여정을 택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노바디의 현재 = 삶은 유의미해진다.

<버스데이 걸>의 ‘그녀’는 자신의 20번째 생일날, 자신이 일하는 레스토랑의 사장으로부터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앞서 말했듯 소원이란, ‘이상적인 미래’의 다른 표현이다. 그녀는 사장에게 소원을 빌었고, 사장은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녀가 사장에게 말한 것은 ‘시간이 걸리는 소원 = 먼 미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소원을 이야기했는지 화자에게 끝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바디가 가능성을 향해 제 3의 길로 나아간 것처럼, 그녀도 자신의 미래가 단정되어 버리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서] 소설가의 일

“돈이 생길 때마다 16밀리 필름을 사서 냉장고에 저장하라. 매일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필름에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 당신은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1994년 박찬욱과의 인터뷰 중에서-

위에 인용한 타란티노의 어록을 비롯해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감독의 길> (최근에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이나 김영하의 산문집 <보다>, <말하다>, <읽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류승완의 본색>,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과 같은 에세이를 나는 무척이나 좋아한다. 이러한 저작들은 작가들의 삶 그 자체가 매우 훌륭한 이야깃거리임을 증명한다. 이들이 독자들을 향해 말하는 바는 대체로 비슷하다. 첫번째, 일단 실행할 것. 두번째, 꾸준히 정진할 것. 결국 이야기를 쓰는 데 있어 중요한 덕목은 번뜩이는 영감이나 재능같은 게 아니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과 그 실행력을 유지시키는 근면함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긴데, 나는 굳이 그 뻔한 이야기를 다시 듣기 위해 이런 책들을 찾아서 읽는다. 비슷한 결론이지만, 그 결론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작가의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는 우리가 <오이디푸스왕>을 알고 있으면서도 <올드보이>를 보고, <오디세이아>를 알면서도 <라이프 오브 파이>를 관람하는 것과 비슷하다.

김연수 작가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은 김연수 작가의 이전 산문집인 <청춘의 문장들>의 연장선에 있는 산문집이다. <청춘의 문장들>이 제목 그대로 김연수 작가의 젊은 시절, 즉 청춘의 고민들을 이야기한 책이었다면, <소설가의 일>은 그보다는 좀 더 본격적인 소설 작문 가이드에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힘 없이 술술 읽히는 게 이 책의 매력인데, <청춘의 문장들> 못지 않게 김연수 본인의 사례를 재치있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문어보다는 구어에 가까운 책의 문체도 한 몫 거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매일 뭔가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맛이 획기적으로 나아지거나 갑자기 나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팥죽과 팥빙수와 햄버거 패티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세계는 오랜 친구처럼 늘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 스무 살의 내가 역전 근방에서 매일 몇편씩, 때로는 몇십 편씩의 시를 노트에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가게 주인들의 세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를 썼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역시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를 썼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겠지만, 난 왠지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라는 부분에 더 눈이간다.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다. 이만큼 ‘연습’이란 개념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다 어느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성장한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것은 작가의 성장을 의미한다. 성장의 순간은 커다란 희열로 다가온다. 이러한 에피파니를 경험한 이는 쉬이 그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래서 작가라는 족속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한다. 지금도 종종 떠오르는 대학시절 은사의 말씀이 있다. ‘뭔가 한 가지를 잘 하는 사람은 또 다른 무언가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시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던 그 말씀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를 잘 하는 사람은 이미 여러 번의 성장을 경험한 사람이고, 그 희열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잘 하고자 하는 일에 몰입할 줄 아는 사람이다. 꾸준히 정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재능’이라든가 ‘천재’같은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말들은 어딘지 모르게, 그 개인이 쌓아올린 시간과 노력, 성장의 과정을 가벼이 여기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분명 한 순간의 영감으로, 단 번에 써내려가는 작품도 있다. 김연수는 그렇게 쓸 수 있는 소설의 분량을 일생에 한 권으로 정의했다. 김연수는 소설가라서 소설로 예를 들었겠지만, 나는 다른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한 권의 책을 쓰고 난 다음은?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김연수가 언급한 L (long) S (slow) D (distance) 훈련법처럼, 매일 20매의 원고지를 작성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때까지 조금씩 걸어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서] 시를 잊은 그대에게

스스로 이 책의 독자로서 꽤나 적격인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단어 그대로 나는 시를 잊은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의 내게 있어 시란, 관념적이고 현학적이며 재미없고 지루한, 하지만 그럼에도 대학진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만 하는 암기과목 같은 것이었다. 그 시절의 시는 주관적인 해석을 불허하며, 당연히 토론 역시 불가한, 최고 존엄이라 해야할까 신성 불가침의 영역같은 것이었다.국어 선생님이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이 조국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야만 했다. 그러한 이유로, 내가 겪은 교육환경에서의 시는 마땅히 잊혀질 만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이 세상에는 시 말고도 읽어야 하고, 봐야 하고, 들어야 하고,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나는 시를 잊고 지냈다. 내가 알고 있는 시는 시험을 위해 들여봐야하는 것들이 전부였으며, 그나마도 시를 감상했다기보다는 작품에 대한 해설을 달달 외웠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그렇게 시를 잊은 채 흘려보낸 시간이 어림잡아 10년이다.강산이 변하고 천지가 개벽할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이 책과 만났다. 책의 제목은 마치 나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읽기 쉽게 쓰여진 시 감상 지침서다. 저자는 각 장마다 주제별로 2편에서 4편 정도의 시를 소개하는데, 필요에 따라 시가 아닌 노래가사나 소설, 영화 등 다른 매체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짜여진 유연하고도 유기적인 구성은, 주제별로 묶인 서로 다른 시들이 마치 하나의 서사구조를 가진 연작들처럼 보이게 한다. 덕분에 시는 쉽게 읽히고, 해설은 이해를 더욱 폭넓게 만든다. ‘시’로 규정되지 않은 작품들도 시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줄 아는 저자의 포용력 덕분이다.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저자의 화제는 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 사회, 시대, 자연, 그리고 삶 전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확장해 나간다. 그렇게 확장되는 화제들 속에서 독자들은 자신들이 시만 잊고 있던 게 아니었음을, 다른 소중한 가치들도 함께 잊고 살아왔음을 조금씩 깨달아 나간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원래 시라는 문학이 그런 거니까. 사람을 이야기하고, 사회를 논하고, 시대에 하소연하며, 자연을 노래하고, 삶의 일부 또는 전부를 담아내는 문예를 우리는 시라고 부른다. 단지 그동안 우리가 시를 배워왔던 방식이 틀렸을 뿐이다.

끊임 없이 확장되는 화제 속에서, 이 책은 잊었던 것들을 일깨워 줄 뿐 아니라, 미처 몰랐던 것들을 알려주기도 한다. 우동 한 그릇’의 원래 제목이 ‘메밀국수 한 그릇’이라는 것이나 김소월이 딱 내 나이 무렵에 아편 과용으로 사망했다는 사실, 그밖에 시인들의 시시콜콜한 개인사와 가정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잡학스러운 대목들이 연거푸 등장한다.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잡지식을 주워가는 재미도 이 책의 결코 작지 않은 묘미다.

그런데 왜 하필 시였을까? 현대인들이 잊고 있는 것이 비단 시만은 아닐진대 왜 저자는 시를 읽으라 이야기하는 것일까. 책 114페이지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나 폴 포츠가 되고 인순이가 될 수 있다는 환상과 신화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희망을 노래하라고 권하고 싶다. 희망이 시가 되고, 시가 노래가 된다. 그리고 노래가 다시 희망을 준다.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름다운 꿈을 꾸는 사람들이라면, 출세하지 않아도, 돈이 많지 않아도, 병들어 늙어도, 정녕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우리라.”

흔한 자기개발서의 어줍잖은 꼰대식 감성팔이가 아니다. 저자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누구나 폴 포츠가 되고 인순이가 수 있다는 환상과 신화에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헬조선, 88만원 세대, N포 세대 등 온갖 부정적인 수사로 표현되는 오늘, 그러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도 결국 희망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자본가 혹은 정치인으로 대변되는 꼰대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그리고 그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시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하는 것 같다. 여기에 동의하고 말고는 독자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지지하고 싶다. 소설가 김영하의 강연 모음집 <말하다>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요컨대 사람들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대로, ‘글쓰기’로 대변되는 창작활동은 인간의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다.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그러한 활동들이 당장의 내 삶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하더라도, 바위에 낀 이끼처럼 서서히 삶 곳곳에 스며들어 어느 순간 나비의 날개짓과 같은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난 오늘도 바쁜 일상을 쪼개어, 서툴게나마 조금씩 글을 써보고, 그림을 그려본다.

[도서] 지금은 없는 이야기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얻은 깨달음 하나, 세상은 이야기가 지배한다. 단순한 구조의,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는, 짧은 이야기들. 교훈적인 우화들과 가슴을 적시는 수많은 미담들. 그 이야기들은 너무 쉽게 기억되고 매우 넓게 적용되며 아주 그럴싸해서 끊임없이 세상을 떠돌며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을 바라보는 강력한 관점을 제공한다.”

-작가의 말 중에서-

내가 최규석의 우화를 처음 접한 건 아마 20대 초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묘하게 공감되면서도 어쩐지 불편한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며, 내가 느꼈던 감상은 “굳이 이렇게까지 염세적일 필요가 있을까?” 였다. 보다 과격한 표현을 빌리자면, 소위 ‘빨갱이’란 단어로 작가를 수식해도 좋을만큼 그 당시의 내가 읽었던 최규석의 우화는 ‘못 가진 자’의 서러움과 울분으로 가득차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어렸고, 노력이 최우선의 덕목이라 믿고 있었으며, 근면함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신앙을 가진 맹목자였다. 그랬던 그 무렵의  내게 있어 최규석의 우화는 이단의 금서, 사교도의 속삭임처럼 불경한 것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나도 군대를 가고, 길고 짧은 사회생활과 조직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부조리와 불합리를 겪고, 그 것들에 익숙해지게 되면서 비로소 나는 내가 가진 신앙과 이 세상이 너무나도 달랐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단에 눈을 떴다기보다는,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교화, 회개와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 배웠던 성실, 근면, 노력 등과 같은 덕목이 잘못된 가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우리가 배웠던 그러한 가치와 규범들이 실제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최규석은 우화를 통해 그러한 진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최규석의 우화는 모두 하나같이 명쾌하다기보다는 찝찝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통쾌한 웃음을 주는 과거의 우화와는 다르게, 씁쓸한 웃음을 남기는 이야기다. 착한 인물은 비참하게 농락당하고, 노력하는 이는 조소당하는 이야기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들의 이야기이기에 마냥 안타까워 할 수만도 없는 이야기다. 이렇게 우화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면,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혹은 애써 외면해왔던 사회의 면면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규석의 우화는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을 위한 우화인 것이다.

Posts navigation

1 2 3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