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80년대에 절도계를 주름잡던 조세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워낙 옛날 사람인 탓에 나도 그의 찬란한 현역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대도’라는 그의 이명으로 미루어 봤을 때, 말그대로 정말 ‘대단한 도둑’이긴 했던 모양이다. 내가 처음 조세형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게된 것은 90년대 말, 그가 출소 후 보안 업체에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는 기사를 통해서였다. 도둑놈도 레전드 급이면, 유명세로 먹고 살 수가 있구나 싶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도 유명해져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은.
문제는 어떻게 유명해지느냐였다. 나는 가장 무난하고 정석적인 방향을 택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인정받는 것. 결론부터 말하면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실력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커뮤니티나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작업물을 홍보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실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지만, 게시물에 대한 반응과 호응이 항상 작업물의 퀄리티에 정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도 고민중이다. 만약 실력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유명해질 수 있을까? 언제쯤 내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수는 1000명을 넘길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은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 차례 정독한 소감은, 나쁜 책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기대했던 내용과는 적잖은 괴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독특한 이력 덕분에 조금 엉뚱한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그런 엉뚱한 기대감을 배제하고 본다면, 사실 제법 괜찮은 책이긴 하다. 다소 원론적인 면이 없진 않지만, 꽤나 유용한 사회 생활의 팁들이 적잖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생활 10년차를 바라보는 나같은 아저씨가 보기에 그닥 새로운 관점이나 통찰이 느껴지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깨달음의 구간보다는 ‘응 맞아 그렇지’하는 동감의 구간이 더 많았다. 사회에 막 나왔던 그 무렵에 읽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미치지 않고서야>의 저자 미노와 고스케는 분명 특출난 인물이다.그가 만든 책들에 대한 호오를 떠나, 요즘같은 출판 불황기에 미노와가 쌓아올린 연간 100만부 판매의 실적은 가히 경이롭다 할만 하다. 그의 저서 <미치지 않고서야>의 가치 또한 그의 업적과 궤를 같이 한다. 미노와가 출판업계에 종사하며 체득한 경험과 철학을 녹여낸, 사실상 자서전격의 책이기 때문이다.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무용담은, 말그대로 신화로 포장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역으로 이 책이 가지는 한계 또한 이 지점에서부터 기인한다. 파격적이다 못해 무모하고 아슬아슬하기까지 한 그의 경험을 과연 어디까지 일반화 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그가 말하는 행동철학도 과연 모든 상황에서 옳기만 한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달은 점은, 내가 성공과 관련된 자기계발서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개개인이 가진 환경이나 개성이 저마다 다르기에 일반화된 성공론이 있을 수 없다는 개인적인 신념 때문이기도 하고, 대개의 성공신화들이 태생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생존 편향적 시선에 대해 적잖은 경계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감스럽게도, <미치지 않고서야> 역시 이러한 계발서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듯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독을 권하고 싶어지는 것은, 일단 이 책이 상당히 쉬우면서도 재밌는 책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일갈하고 있는 외침들이 현 시류에 상당부분 부합하고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하기 힘들다.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적절히 취사선택 할만한 안목만 있다면, 많은 면에서 얻어갈만한 부분이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독서에서의 가장 큰 수확은 미노와 고스케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이다. 보면 볼수록 재밌는 사람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의 파이팅 넘치는 삶으로부터 많은 에너지를 전달받은 듯한 기분도 든다. “죽는 것 말고는 그저 찰과상일 뿐”이라는 그의 슬로건처럼, 올해는 나도 좀 더 과감한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평생 한 직장에 봉직하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선생님처럼요. 아침이면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하죠. 행복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요. 선생님께 지금 기회가 온 겁니다. 세상을 다시 사는 거예요. 자신이 없더라도 자녀분들을 위해 도전하세요.”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영화 <인 디 에어(원제 : Up in the Air)>에 나오는 장면이다. 사실 이 대화는 영화 전체 맥락에서 그다지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그저 주인공인 라이언 빙엄이 해고 대행인으로서 얼마나 노련한 인물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기능적인 에피소드에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이 유독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았던 것은 라이언 빙엄의 날카로운 질문 때문이었다.
“꿈을 포기한 대가로 받은 첫 월급이 얼마였죠?” “언제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계획이셨습니까?”
이 책에 눈길을 준 이들이라면, 다들 한 번씩 뜨끔하지 않았을까?
브로드컬리 편집부가 발간한 <서울의 3년 이하 퇴사자의 가게들>은, 제목 그대로 퇴사 이후 서울 시내에 가게를 연 사람들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꿈을 쫓아 직장을 박차고 나간 사람들의 이야기. 얼핏 낭만적으로 비춰질 법한 소재지만, 이 책은 그 낭만을 추구하는 과정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니던 직장에서의 연봉, 자산 현황, 매출 및 비용 구조, 근로 시간 등을 직설적으로 케묻는 질문들은 현실의 무게를 절실하게 체감케 한다. 창업 2년차에 들어서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가게도 있었지만, 다수는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심지어 폐업을 앞두고 있는 가게도 있었다. 역시 자영업은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다만, 그럼에도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마냥 불편하지만은 않았던 것은 인터뷰 대상자들의 긍정적인 태도 덕분이었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모두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적어도 창업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든 상황을 내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써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였다. 각자 나름의 신념을 갖고, 자신만의 철학을 관철해 나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 또한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청년으로서, 그들의 도전을 열렬히 응원한다.
지난 30여년간 <터미네이터>, <공각기동대>, <매트릭스>, , 등 적잖은 SF물을 보며 개인적으로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사람들은 미래를 두려워한다는 것. 영화든 소설이든 SF의 세계에서 미래는 대체로 어둡게 그려진다. 외계인이나 기계에게 인류가 지배당하기도 하고, 고도화된 사회시스템에 의해 극단적인 독재정권이 탄생하기도 하며, 교육환경이나 의료기술의 그릇된 발전방향으로 인해 인간성이 배제된 사회체제가 등장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어두운 미래상이 대부분 지난 역사를 기반으로 재구성된 세계라는 점이다.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우주전쟁>, <혹성탈출> 등의 이야기는 과거 서구 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을 뒤집은 것이고, <멋진 신세계>, <이퀼리브리엄>으로 대표되는 지독한 독재체제는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의 파시즘을 변주한 것에 불과하다. , <블랙미러> 등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또한 오늘의 사회문제를 확대하고, 거기에 살을 붙인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인류가 미래에 대해 품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은 지난 날과 오늘날의 과오가 훗날 또 다시 반복되지 않을까하는 우려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SF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반성한다. 그런 관점에서, SF는 미래를 가장한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초엽 작가의 SF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7편의 단편들 역시 상술한 바와 궤를 같이한다. 저마다 고유한 설정을 가진 각각의 세계는, 미래를 배경으로 우리들의 현재와 과거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들이 여느 SF 소설보다 상대적으로 편하게 읽히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다른 작품들처럼 거창한 소재에 주목하기보다 소소한 일상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김초엽 작가가 그려낸 미래는 두렵다기보다는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 책을 관통하는 정서는 ‘상실’이다. 작가는 기술이 발전해감에 따라 우리가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추억과 그리움, 동경과 열망, 애정과 증오 등 과학적으로 미숙했기에 우리가 지닐 수 있었던 자잘한 감성들. 그것들이 사라져버린 세계를 통해 그러한 감성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하루에 한 꼭지씩 읽으며 출퇴근했던 지난 일주일간 통근길이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고, 이야기들의 결말이 비극으로 향하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독특하면서도 따스한 시선의 김초엽 작가가 앞으로 그려낼 또 다른 우주를 기대하며, 짧은 독후감을 마무리한다.
초등학생 시절,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행복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그 때의 글이 세부적으로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서론과 본론에서 몇 가지 방법론을 제시하다가, 결말에 이르러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진정한 행복이란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행하는 게 아닐까’라며 마무리하는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서툰 문장이었지만 진심을 담아 쓴 글이었고, 그 진심이 닿았는지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글짓기 상이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20여년이 지났다. 강산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변하는 와중에도 그 믿음의 골격만큼은 항상 굳건했다. ‘행복한 삶은 스스로 원하는 바를 행하는 삶’이라는 것. 다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 가지 단서가 덧붙여졌는데, ‘근데 이게 생각처럼 늘 쉽지만은 않더라’는 것이다. 현실은 언제나 이상보다 가혹한 법이다. 금전적인 문제, 사회적인 명예, 지위와 관계 등 행복을 위해 넘어서야 할 수많은 조건들이 매순간 우리의 결정을 가로막는다. 심지어 수동적인 삶에 평생동안 길들여진 나머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불행한 삶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최근 웹서핑 중에, 우연히 법륜스님과 한 직장인의 고민상담을 듣게 되었다. 힘들게 공부해서 겨우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는데,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하루하루 출근하는 게 너무 힘들다, 그래서 관두고 싶은데 주변의 시선과 만류때문에 퇴사도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그 회사원은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울먹이고 있었다. 굳이 법륜스님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몇몇 사람은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도 하겠지만, 그건 해결이라기 보단 유보에 가깝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선 퇴사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정이 또다른 고민의 시작점이라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당장의 생계에서부터 대출이자와 할부금, 경력관리, 재취업 등 자유의 대가로 감당해야할 적잖은 문제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회사원이 고민을 이야기하는 내내 울먹였던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니었을까. 삶은 모 아니면 도 식의 단순한 이지선다 문제풀이가 아니다. 과감하게 도시생활을 박차고 나간 야인들을 다룬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의 인기는, 어쩌면 이런 현대인들의 대리만족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현대인들의 불행은 행복해지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니다. 방법을 알아도 그것을 실천하는데 있어,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행복에 대한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글들은 일시적인 위안을 줄 뿐,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해 주지 않는 까닭이다. 최인철 저자의 <굿라이프>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굿라이프>가 던지는 메세지들은 대개 우리가 이미 다양한 경로로 접했던 원론적인 이야기들이다. 다만 그럼에도, 다양한 실증적 연구의 사례를 들어 메세지의 설득력을 높인 점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행복의 본질를 증명해내기 위한 실험의 설계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가 행복한 삶을 위해 어떤 것들을 고려해야할지 되새기게 만들어준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효용성은 어떨지 몰라도, 사회 및 조직의 정책 연구에는 상당히 유용한 참고자료가 되지 않을까.
최근 워쇼스키 자매의 영화 <매트릭스>가 20년만에 재개봉되었다. <성경>에서부터 <장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다양한 레퍼런스를 폭넓게 차용한 이 영화는, 개봉 직후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적 담론을 이끌어냈다. 대표적으로 가상현실, 노장 사상, 불교에서의 윤회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런 다각적인 담론들 사이에서 의외로 많은 이들이 많이 간과하고 있는 논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매트릭스>의 세계관이 차별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다시말해, <매트릭스>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근거는 매트릭스 1편과 2편 사이에 공개된 <애니 매트릭스>의 수록작 <두번째 르네상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번째 르네상스>는 <매트릭스> 본편 이전의 역사를 다룬 프리퀄 애니메이션으로, 매트릭스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소 복잡한 줄거리이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고도화된 인류 문명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인조인간을 만들어 내었다. 인조인간의 개체수가 늘어나며 점차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이를 적대시하는 인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인조인간에 대한 무분별한 테러로 표출된다. 기계와 인간들의 갈등이 서서히 심화되는 가운데, 학대를 견디다 못한 로봇이 인간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살인을 저지른 로봇은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폐기처분을 받는다. 이 일을 계기로 로봇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가 열렸는데, 그 규모는 실로 엄청났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시위를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압하였고,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된 기계인류는 탄압을 피해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인간과 기계의 갈등은 사회문제에서 국제문제로 양상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기계국가는 뛰어난 기술력과 생산성을 바탕으로 인류의 산업경제를 순식간에 장악했고, 이에 인류는 경제제재와 무역봉쇄로 대응한다. 기계국가는 인류와의 공존을 모색하며 외교적 타협을 시도했지만, 인류는 결코 그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인간과 기계간의 첨예한 외교적 갈등은 곧 새로운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인간들이었다. 인류는 그들이 가진 핵무기를 동원하여 기계들을 공격했고, 개전 초기에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인류는 기계문명의 압도적인 기술력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고, 굴욕적인 항복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인류는 기계문명의 건전지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가 함의하고 있는 바는 명료하면서도 묵직하다. <매트릭스>의 디스토피아를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인간들 자신, 더 정확하게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편협한 차별의식이라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서 보면, 이 디스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은 <매트릭스> 본편에서 시스템을 상징하는 ‘요원들’이 전형적인 양복차림(화이트칼라)의 백인 남성들로 그려지는 반면, 저항세력인 느부갓네살 호의 승무원들이 다양한 인종과 성별을 가진 집단으로 그려지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차별에 대한 인식론적 물음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 속의 인류는 서로 반목하기 보다는 오히려 단합된 모습을 보인다. 특히 종반부의 기계문명과의 전쟁을 앞둔 대목에서는 모든 인류가 국가와 종교, 문화, 인종을 넘어 대통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들의 차별없는 화합이 또 다른 차별을 위한 것이라는 점은 매우 역설적이다. 즉, 차별이란, 우리의 인식 영역 바깥에서 벌어지는 행위라는 것이다.
위의 맥락에서, <두번째 르네상스>나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보며 떠올린 것은, 차별에 대한 문제는 어떤 행위보다는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대부분의 차별은 무관심이나 무지, 혹은 왜곡된 정보에 의해 발생한다. 바꿔 말해,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상당수의 차별을 극복해낼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다문화화 되어가고 있는 오늘, <매트릭스>와 같은 디스토피아를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 모두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서양 철학자 중 한 명일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로 대표되는 그의 어록이 수시로 인용되는 것만으로도, 대중들 사이에서의 그의 인지도와 입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인지도가 무색하게도, 막상 소크라테스의 삶과 그의 최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많다. 대표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그랬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게 된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내 지식의 여백을 채울 수 있었던 귀중한 경험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1차 판결 전 연설과 2차 판결 전 연설, 사형이 확정된 후의 최후 연설,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세 차례의 연설은 다소 시점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아테네인들을 향한 소크라테스의 절박한 탄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정독하며, 내가 떠올린 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가짜 뉴스와 여론재판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집행으로부터 25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그의 죄목에 비해 과도한 형벌을 받았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2차 판결에서 소크라테스가 360 대 140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 판결을 받았던 걸 보면, 당시 아테네인들의 눈에는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아마 당시에 소크라테스를 모함한 이들의 명망이 우리의 예상 이상으로 높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당시 소크라테스의 명성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아테네인들의 시각에서 이 연설문을 읽지 못하는 점이 참으로 아쉽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오늘 날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각종 가짜 뉴스와 여론 재판에 이를 대입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는 시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스스로의 사고를 객관적인 것이라 믿고, 보고 싶은 걸 보고 듣고 싶은 걸 들을 뿐이다. 그 결과는 때때로 옳은 판단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그른 판단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과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은 소크라테스의 최후 변론에서도 언급되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난 날의 소크라테스와 오늘날의 소크라테스, 그리고 앞으로 있을 내일의 소크라테스들을 떠올리며, 무엇이 정의인지 다시 한번 고민해본다.
나는 강산을 포함한 세상 만물이 10년 단위로 크게 변한다고 믿는다. 물론 삶 또한 예외가 아니다. 수많은 통계와 조사 자료에서 사람의 연령대를 10대, 20대, 30대 등으로 나누는 것은 단순한 편의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0대에 있었던 가장 큰 변화는 사춘기였다. 몸의 변화가 먼저 찾아왔고, 곧 정신의 변화가 뒤따라왔다. 처음으로 꿈과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대부분은 망상이었지만, 어떤 지향점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방향에 대한 부모님의 간섭이 없어 좋았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좋고 나쁜 일이 있었지만, 대다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적어도 크게 후회할만한 일은 없었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스무살에 일어난 변화는 10대에 있었던 변화보다 여러모로 극적이었다. 우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었고, 시간표를 마음대로 짤 수도 있었다. 수업시간엔 동갑내기 외에 다양한 나이와 개성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했다. 대학생으로서 맞이한 이 모든 변화가 생경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음주와 흡연을 비롯한 각종 유흥이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그 시절, 나는 술자리에 탐닉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그 무렵 있었던 학과 내 술자리엔 빠짐없이 모두 참석했던 것 같다. 입학 동기보다는 학과 선배와의 술자리가 더 좋았다. 일단 술값이 들지 않았고, 선배들은 새파랗게 어린 후배의 실수에 관대했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더 귀엽게 봐주기도 했다. 나 역시 나보다 몇 년을 앞서 학교를 다닌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수많은 술자리에 참석하면서, 여러 선후배들과 어울렸고, 스스로도 내가 사람을 꽤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때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의 세계가 크게 팽창하고 있었다.
30대를 맞이하며 겪은 변화 중 하나는 더 이상 불필요한 술자리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불필요’의 기준은 오롯이 나의 마음이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굳이 가지 않는다. 심지어, 직장에서의 회식도 가기 싫으면 적당한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간혹 내게 섭섭해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자리엔 참석했으므로, 내 입장에선 만족스러웠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고, 그 대신 스스로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미래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이렇게 적어 놓은 걸 보면, 마치 내 20대가 무의미한 방황의 시절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오히려 나의 20대는 스스로에 대한 치열한 탐색전의 시간들이었다. 술만 마셨던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내 짧은 삶을 통틀어 가장 유의미한 인연과 담론은 모두 20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궁핍하고, 처절한 순간의 연속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매순간이 빛났다. 당연히 후회나 미련도 없다. 10대가 신체의 성장기였다면, 20대는 정신의 성장기였다. 법적으로는 스무 살에 성인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서른 살에 성인이 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박준 시인의 에세이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으며, 내 지난 20대 시절을 떠올렸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으로, 음울함이 감돌았지만, 어쩐지 우울하지만은 않았던 그 시절. 사람을 좋아했지만, 사람 때문에 상처받아야 했던 그 시절. 그리고 그런 나날을 보내고,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지금. 이 모든 순간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실감했다. 책 제목처럼,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오늘까지 나아올 수 있었다. 이제껏 내가 겪어왔던 모든 희노애락의 순간들에 감사한다.
어렸을 적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우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일도 아니고 남의 일인데, 심지어 저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인데, 도대체 왜 우는 걸까? 그 시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스무 살 무렵부터 슬픈 영화를 볼 때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이제는 제법 잘 울게 되었다. 변화는 약 10여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났던 것 같다. 최근에도 꽤 울었지만, 그럼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4년 전쯤 부모님과 함께 <국제시장>을 관람했을 때다.
외할머니의 장례 직후였다. 사흘내내 장례식장을 지키며, 어르신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대개 화제는 고인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해서 사회,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방면으로 전개되곤 했는데, 그 중에는 당시 개봉중이던 영화 <국제시장>도 있었다. 익히 알려졌듯 영화 <국제시장>은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나의 외가 역시 흥남 철수 때 남한으로 피난 온 실향가정이었다. 본래 외가는 북청에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나이터울이 많이 나는 큰 외삼촌은 흥남철수 당시를 기억하고 계셨다. 큰 외삼촌은 <국제시장>을 보면서, 마치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것 같다고 하셨다. 평소 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부모님이었지만, 외삼촌의 말씀에 마음이 동하신 듯 보였다. 장례식을 마치는 대로 부모님을 모시고 영화관에 가기로 했다.
사실 나는 윤제균 감독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전작 <해운대>를 보며, 작위적인 설정과 노골적인 신파에 몸서리쳤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국제시장>에 대한 기대치도 이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저 효도한다는 마음으로 부모님과 영화관에 갔다. <국제시장>은 정확히 예상대로의 영화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눈물이 펑펑 나왔다. 외가에서 장례를 지내고 온 여파가 컸다.
흥남철수를 그린 첫장면에서부터, 등장인물과 우리 가족의 모습이 겹쳐졌다. 외할머니가 저렇게 힘들게 내려오셨겠구나, 정착하는 것 또한 쉽지 않으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와 가슴 속을 멤돌았다.
슬픔의 가장 큰 전제 조건은 ‘공감’이다. 아무리 그럴 듯한 이야기라도,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슬픔을 느낄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허술한 이야기여도 공감할만한 구석이 있다면, 슬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내게 <국제시장>은 완전히 후자의 케이스였다. 알면서도 당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심히 못마땅했지만, 이 영화가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것에 대해서도 일정부분 납득이 갔다. 지극히 상투적인 작품이지만, 그 시대를 직접 살았던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인생영화였을지도 모른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으면서, 어쩐지 이 때의 일이 떠올랐다. 기본적으로 이 책이 다양한 작품들에 대한 평론집인 탓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 슬픔이란 곧 공감이다. 그리고 공감의 원천은 경험이다. 경험할 수 없는 것은 공부해야한다. 이는 영상매체나 문학작품을 통한 간접경험을 장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론집인 이 책의 제목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인 것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었을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덕분에 새로 접하게 된 작품도 있었고, 존재 자체를 처음 알게 된 작품도 많았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온전히 읽었다고 보기엔 다소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당장 찾아봐야할 작품이 늘었다는 점이 반갑고 또 즐겁다. 어떤 공부든 끝이 없는 법이다.
이스라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는 “인간의 불행은 인류의 농업혁명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농사는 잉여식량을 만들어냈고, 잉여식량은 빈부의 차이를 만들어냈으며, 빈부의 차이는 계급갈등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다. 그런 맥락에서, ‘빈부격차’는 곧 ‘신분격차’와 상통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이 생겨난 이래로 인류는 항상 신분 상승을 갈망해왔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늘 적잖은 좌절을 겪기 마련이고, 그렇게 억눌린 욕망은 다시 이야기를 통해 표출된다. 이 때, 이야기는 훌륭한 대리만족과 정신승리의 수단으로 거듭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 속 부자(혹은 권력자)들은 대개 악하게 그려진다. 그래야 그들을 해치는 행위가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야기 속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착하다. 이같은 ‘나쁜 부자(권력자) 대 착한 약자’의 구도는 고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반복변주되어 왔다. 수차례 봐온 이야기임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나쁜 부자들이 쓰러지는 장면에 열광한다. 현실에서 느끼기 힘든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의 흥행은 이를 방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베테랑>은 매우 쉬운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선량한 노동자’와 ‘사악한 재벌 3세’, ‘정의로운 경찰’이 등장한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어떤 이야기인지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몇몇 장면에서는 실제 사건을 차용하여 일정한 현실감을 부여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정의로운 경찰이 사악한 재벌 3세를 때려잡으며 마무리된다. 우리는 이 영화가 전형적인 권선징악 판타지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에 빠져들고 열광하며 환호한다. 그런 일이 현실에도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1300만 관객이라는 이 영화의 스코어는, 대중들이 가진 열망의 크기를 대변하는 듯 하다.
한편, 박찬욱 감독은 중편 영화 을 통해, ‘나쁜 부자’와 ‘착한 약자’의 관습적인 구도를 뒤집어 버린다. 의 주인공 류지호는 재능있고 부유한 인기 영화감독이다. 그는 인품도 훌륭해서, 말단스태프에게도 결코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다. 어느 날, 그의 집에 괴한이 침입한다. 괴한은 류지호를 위협하며, 류지호에게 악행을 저지르라고 강요한다. 패닉상태의 류지호는 괴한에게 묻는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괴한은 대답한다. 나는 당신처럼 돈 많고 잘난 사람이 착하기까지한 게 마음에 안 들어. 황당한 범행 동기지만 관객들은 이내 수긍한다. 괴한은 오랜 가난으로 이미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독특한 관점은 메이킹 필름에 수록된 그의 코멘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은 너무 착해서 내가 견딜 수 없다’라는 그것이 출발이에요. 내가 살면서 잘 사는 사람, 부자들, 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을 더러 만날 때가 있는데, 옛날에 우리 부모 세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악독하고…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근데 요즘에는 아닌 거 같아요. 잘 사는 사람이 착하기도 한 경우가 더 많아요.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은 성격까지 더 삐뚤어지기 쉬운 세상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시작된 이야기죠.
최근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또한 이와 비슷한 발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약자 대 약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기생충으로 은유되는 영화속 빈곤층은,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는다. 영화 속 부자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악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애초에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고,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을 굳이 미워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이들은 기생충들의 싸움에 휘말려 희생되는 무고한 숙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약자 대 약자’의 싸움이 벌어진다. 선량한 흑인 톰 로빈슨은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 재판에 회부된다. 톰 로빈슨을 신고한 이는 밥 유얼이라는 이름의 백인 남성이다. 밥 유얼은 지독한 극빈층으로, 흑인 빈민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흑인들에 비해 나은 점은, 인종차별이 있던 시대에 백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뿐이다. 밥 유얼은 톰 로빈슨이 자신의 딸을 겁탈했다고 주장한다. 톰 로빈슨과 밥 유얼은 사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밥 유얼은 이를 부정하고 싶어한다. 그는 어떻게든 톰 로빈슨을 저 밑으로 끌어내려서, 적어도 자신이 흑인들보다는 나은 존재임을 증명하려 한다. 그에 비해, 애티커스 핀치로 상징되는 백인 지식인들은 오히려 톰 로빈슨에게 호의적이다.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어떤 것이 정의로운 행동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과 <앵무새 죽이기>가 보여주는 ‘약자 대 약자’의 갈등구조는 소름끼칠 정도로 현실적이고, 일상적이다.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대부분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직장 상사나 동료, 부하, 가족, 친구와의 갈등은 일상적이지만, 재벌총수나 대통령같은 사람들과의 갈등은 어딘가 비현실적이다. 갈등은 커녕, 애초에 그런 사람들을 한 번 만나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우리는 평생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반대로 주변의 누군가에게 미움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선과 악은 지극히 상대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톰 로빈슨과 밥 유얼의 모습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전에 자신의 발밑부터 먼저 돌아보길 권한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발이 다른 누군가의 등이나 어깨, 혹은 정수리를 밟고 있을지도 모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