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운명과 분노

나의 아버지는 미술 선생님이었다. 중학교에서 10여년간 아이들을 가르치시다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미술학원을 개원하셨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장소가 바뀌긴 하였으나, 아버지가 미술 선생님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고, 내가 미술 선생의 아들인 것도 변함없었다. 아버지가 미술 선생님이시긴 했지만, 나는 그에 따른 수혜를 거의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시는 일이 좀처럼 없었고, 당연히 당신의 자녀들에게 특별한 기술이나 기법을 전수하는 일도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가 미술을 전공하길 바라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유는 뻔했다. 한국 대다수의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삶을 되물림하길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라면서 미술과 관련된 기술들을 하나 둘 습득해 나갔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미술과 관련해서만큼은 언제나 주변의 아이들보다 빨랐다. 흔히 말하는 재능이나 자질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런 것보다도 ‘미술가의 아들’이라는 내 내면의 자의식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모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자식들은 결국 부모의 등을 보며 자라기 마련이다.

내가 교실 한 켠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 내가 그림그리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아이들에게 관심받는 것을 좋아했다. 내게 있어 그림은, 친구를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다른 반 친구들도 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였다. 초등학생 시절의 내 장래 희망은 화가였다. 언젠가 위인전에 실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엔 디자이너나 만화가에 대한 위인전이 없었다. 그러다 열 살 무렵에 <드래곤볼>을 보게 되었고, 좀 더 커서는 <슬램덩크>를 보게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나의 장래희망은 만화가로 바뀌어 있었고, 그 이후로도 줄곧 나의 꿈은 만화가였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나의 위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확고했다. 나는 중학교에서도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 나는 내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대로 어른이 되면, 그대로 만화가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등학교,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나는 근거없는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아직 진로조차 정하지 못한 또래들에 비해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무방비로 20대를 맞이했고, 무방비로 20대를 허비했다. 아마 내게도 몇번의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그중 일부는 알면서도 잡지 못했고, 나머지는 몰랐기 때문에 잡지 못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대학교 졸업반이었다. 나는 미련없이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꿈을 추구한 대가로 불행한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고흐의 그림을 좋아했지만, 고흐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무방비 상태로 20대를 보낸 덕분에 취업은 쉽지 않았고, 학교 선배의 도움으로 들어간 첫 회사는 형편없었다. 가까스로 1년을 채우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회사를 나와 내가 향한 곳은 결국 다시 ‘만화’였다. 마침 그 시기에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공모전이 열리고 있었다. 재취업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띄워보고 싶었다. 이번에 안 되면, 앞으로 만화 쪽엔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나는 석달간의 준비 기간을 설정하고, 그 기간동안 공모전에만 매진했다. 그야말로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보기 좋게 낙방했다. 의외로 비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좌절이라기 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어쩌면 스스로도 결과를 직감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은 듯 툴툴 털어내고 곧 재취업을 했다. 다행히도, 두번째 회사는 이전 회사에 비해 훨씬 좋은 곳이었다. 나는 그간의 긴장을 풀고, 한동안 여유로운 직장인의 삶을 만끽했다.

그렇게 몇년의 시간이 지나고 안정이 찾아올 무렵,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의 사건과 계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건 앞서 열거한 에피소드들에 비해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나는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회사생활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지난 날의 그 어느 순간보다도 진지하게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나는 운명 혹은 필연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소설가 김영하의 에세이 <앞에서 날아오는 돌>에서, 한 점쟁이는 젊은 시절의 김영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입니다.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고 다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힘이 들지요.”

나는 이 비유가 퍽 맘에 들었다. 삶이란, 날아오는 돌을 피하는 것 만큼이나 녹록치 않은 일이다. 알면서도 실패하고, 모르는데도 성공하곤 한다. 운명이나 숙명같은 단어도 그런 연유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운명과 숙명이 얽혀 사회가 만들어지고, 이야기가 탄생한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운명과 분노>를 읽으며, 어떤 글을 쓰면 좋을지 적잖은 고민을 했다. 운명론, 페미니즘, 수저계급론 등 다양한 소재를 두고 갈팡질팡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은 모두 지엽적인 논점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하나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새터화이트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운명 파트와 분노 파트의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것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된다. 본래 역사란, 관점의 학문이니까. 로토와 마틸드의 열전을 보면서, 나도 나의 역사를 한 번쯤 정리해보고 싶었다.

[도서] 이방인

내가 어릴 적, 우리집은 자주 이사를 다녔다.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마다 옮겨다녔던 것 같다. 그만큼 학교도 자주 옮겨다녀야 했고, 그와 동시에 많은 만남과 이별을 경험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동안 깨달은 것 한가지는,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동네는 동네들대로 참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사를 다닌 곳은 전부 서울 시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마다 사소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놀이의 룰이 달랐고, 놀이에서 사용하는 어휘가 달랐다. 심지어 아이들이 수시로 내뱉는 비속어의 억양조차도 조금씩 달랐다. 그런 까닭이었을까. 아이들은 내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낄낄대며 자지러지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좀 억울한 기분도 들었지만, 이내 그들의 방식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10대를 철저히 이방인으로서 보냈다. 요새 흔히 말하는 ‘인싸’도 ‘아싸’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가 나의 자리였다. 그 애매한 위치에서 나는, 사람들과 애매한 거리를 두는 법을 익혔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 한동안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했다. 계기는 군 전역을 앞둔 20대 초중반의 언저리에서, 친했던 군대 후임이 내게 던진 말 한 마디였다.

“다른 고참들은 전역 앞두고 전화번호다, 주소다, 하며 이것저것 남기는데, 윤뱀은 안 하십니까?”

그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 이면에서는 적잖은 서운함이 느껴졌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당시 내 상황에 대해 부연하면, 나는 디자인병이란 명목으로 남들과 조금은 다른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첫 자대였던 오산 비행장에서 대공포병으로 복무하다가, 디자인병으로 차출되어 계룡대 공군본부로 내려가 1년을 복무하고, 말년은 자운대 공군대학에서 보내게 되었다. 2년 남짓의 짧은 군생활에서조차도, 나는 이방인의 삶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가끔 부모님도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너는 애가 왜 그렇게 차갑니?”

거기에 군대 후임의 말까지 더해지면서, 나는 일종의 각성을 했다. 나는 남들과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번 독서모임을 통해 카뮈의 <이방인>을 읽게 되었다. <이방인>의 줄거리는 명료하지만, 그 이면의 메세지는 제법 난해하다. 본편만큼의 분량으로 수록된 해설이 그 사실을 반증한다. 주인공 뫼르소는 확실히 일반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런 그의 독특한 개성은 소설의 첫문장에서부터 드러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냉소적인 첫 문장에서부터 소설 말미에 이르기까지, 뫼르소는 시종일관 비상식적인 행동들을 보인다. <이방인>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상당히 난해한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그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여기에 그럴듯한 몇 가지 수식을 더해 보고 싶지만, 마땅한 문장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더불어, 이미 수많은 해설이 제시된 작품인만큼 관용적인 표현을 쓰는 게 오히려 식상해 보이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어딘가 그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라는 게 지금의 내게 있어 가장 솔직하고 정확한 감상평인 것 같다. 한 10년 쯤 뒤,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도서] 바람의 열두 방향

내가 처음 어슐러 K. 르귄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13년 전쯤, 스튜디오 지브리의 신작 애니메이션 <게드전기>의 개봉 소식을 접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지브리에게 있어 <게드전기>는 여러모로 중요한 지점에 있는 작품이었다.지브리의 수장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의 첫 연출작이었기 때문이다. 세간의 이목은 미야자키 고로가 과연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할 수 있을지에 쏠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도무지 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혹평이 쏟아졌고, 2대 세습을 도모한 미야자키 부자 역시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순 없었다. 이후 지난한 흥행부진의 침체를 겪던 스튜디오 지브리는 결국 2014년 해체 발표를 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쇠락이었다.

<게드전기>는 어슐러 K. 르귄의 <어스시 연대기> 중 세 번째 작품인 <머나먼 바닷가>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원작과 여러 부분에서 상이해서, 원작자인 어슐러 K. 르귄은 영화를 보고, “이것은 내 책이 아니다, 고로의 영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어슐러 K. 르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 지점에서부터였다. ‘영화는 형편없었는데, 원작은 많이 다른가?’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조금 더 알아보니, 어슐러 K. 르귄의 대표작 <어스시 연대기>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더불어 3대 판타지 문학으로 꼽힌다고 한다. 아아, 원작은 굉장히 좋은 작품이었겠구나. 이 쯤되면 한 번 찾아서 읽어봤을 법도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책을 읽지 않는 청년이었다. 그렇게 13년이 흘렀다.

우연치 않게 독서모임에서 어슐러 K. 르귄의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이 모임용 도서 후보로 거론되었다. 나는 13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바람의 열두 방향>에 한 표를 던졌다. 나의 불찰이었다. 책장을 펼쳐 몇 페이지를 정독한 후의 감상은 ‘큰일 났다’였다. 내용 이전에, 번역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았다. 어휘 사용이 어색한 건 둘째치고라도, 군데군데 비문도 적잖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이 책이 단편집이라는 것과 이야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뿐 아니라 각 단편에 삽입된 작가의 머리말에도 의미심장한 구절이 여럿 있었다. 몇몇 이야기는 통속적이었지만, 또 몇몇 이야기는 꽤 신선했다. 개인적으로는 <샘레이의 목걸이>와 <아홉 생명>, <물건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독특한 설정과 전개로 창작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었다.

결과적으로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이번 기회에 읽은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독서모임용 책으로 적합했는지는 조금 의문이 남는다.

[도서] 백년을 살아보니

95년에 창간되어 2003년 폐간된 <키노>라는 영화잡지가 있다. 영화에 대한 수준 높은 담론으로, 당시 영화 애호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전설적인 잡지다. <키노>에 실렸던 몇몇 기사들은 폐간이 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요즘까지도 간간이 인구에 회자되곤 하는데, 박찬욱 감독의 묘비명에 관한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2003년, <키노>는 두꺼운 2권짜리 <영화감독사전>을 편찬한다. 책의 제작을 위해 <키노>는 한국 감독들을 대상으로 앙케트를 진행했는데, 그 중에는 ‘당신의 묘비명을 직접 쓴다면?’이라는, 제법 짓궂은 설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대가 영화감독들이었던 만큼 아마도 기발한 답변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대부분은 오래지 않아 잊혀지고 말았고, 오직 박찬욱 감독의 답변만이 현재진행형으로 영화팬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박찬욱 감독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67편의 장편을 만들고, 35편의 단편을 만들었으며, 48편의 각본을 제공한 자. 영화감독치고는 비교적 덜 이기적이었던 자, 여기 잠들다. “

영화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태도와 지향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문구였다. 박찬욱 감독의 당당한 포부가 참 부럽기도 했다. 아마도 이 인터뷰를 본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당신의 묘비명을 직접 쓴다면?’

나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이제껏 살아오며 이뤄놓은 것이 없으니,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를 생각해 봐야 했다. 몇 가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긴 했지만 차마 글로 옮겨 적지는 못했다. 거창한 포부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작은 것부터 이뤄보고, 그 이후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내 묘비명은 아직도 백지상태다.

김형석 교수의 수필집 <백 년을 살아보니>는 내가 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고민이 느껴지는 책이다.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어떻게 늙어야 하는가? 떠나기 전에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등등 백 년의 세월 동안 자신의 눈으로 보고 느낀 것들을 하나하나 읽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그 중 몇몇 부분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선뜻 동의하기 힘들었고, 또 몇몇 부분은 너무 도덕책 같은 이야기라 낯간지럽기도 했다. 좀 더 삐딱한 관점으로 보면, 나이 많은 꼰대의 잔소리 같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건 역시 백 년이라는 세월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듯, 뻔한 말이라도 한 세기의 시간을 보낸 노학자를 통해 듣게 되면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게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해 당당한 김형석 교수의 태도가 보기 좋았다. 그 당당함을 위해, 그 역시 한평생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김형석 교수가 남긴 장문의 묘비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을 책에 비유한다면, 묘비명은 책의 마지막 문장에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란 항상 시작하는 것보다 마무리짓는 게 어려운 법이다. 짧은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자문해 본다. 나는 내 묘비명에 어떤 말을 적을 것인가?

[도서] 우리가 녹는 온도

“너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 같아. 예전에는 은하 1호였는데 언제부턴가 은하 2호가 된 것 같아.”

“그럼 너는 영재 몇 호?”

“나는 영재 6호. 원래 그냥 소심한 영재 5호쯤 됐는데. 너 만나고 영화 만들고 그러면서 영재 6호가 된 것 같아. 자기중심적인데 좀 귀여운 그런 거. 근데 이제 너랑 헤어지면, 영재 7호가 되겠지. 너를 그리워하면서 시나리오나 쓰는…나중에라도 은하 3호가 나타나서 영재 7호를 다시 사랑해주면 좋겠다.”

– 영화 <은하해방전선> 중에서 –

나는 윤성호 감독의 2007년 作 <은하해방전선>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캐릭터 설정에서부터 배우들의 열연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의 매력은 정말 무궁무진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위에 인용한 대사였다. 세상에… 영재 5호가 은하 1호를 만나 영재 6호가 되었다니…사람이 사람을 만나 변하는 과정을 이만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자신의 지난 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형준 몇 호란 말인가?

최근에 많이 쓰이는 신조어 ‘케미’라는 단어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관계는 화학작용과 유사한 점이 많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며, 일단 관계가 시작되면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나 역시 대부분의 경우,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변화해왔다. 10대 시절의 나는 낯을 심하게 가리는, 소심한 아이였다. 그랬던 내가 변한 건 ‘남고’라는 조금 색다른 환경에서였다. 거칠고 과격한 남자아이들 사이에 부대끼며, 조금씩 대범해지는 법을 익혔다. 20대 초반의 나는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는 청년이었다. 매사에 우물쭈물하고, 실천하지 못한 일에 대해선 항상 변명으로 일관했다. 스스로도 답답해했던 내 성향을 바꾼 건 다름 아닌 ‘군대’였다. 군대에서는 언제나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 없이 2년을 보내고 전역할 무렵, 나는 더 이상 행동하는 걸 겁내지 않게 되었다. 20대 중반의 나는 대책 없는 낙천주의자였다. 취업이나 진로는 때가 되면 알아서 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엄혹한 취업시장을 체감하고, 졸업 후 1여 년간 블랙회사를 다녀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현실감각이란 걸 익힐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변화의 순간이 있었다. 스무 살 이후, 적어도 매해 2~3번 정도의 크고 작은 업데이트를 했던 것 같다. 굳이 지금의 내게 번호를 매긴다면 대략 형준 28호쯤?

정이현 작가의 산문집 <우리가 녹는 온도 : 그들은 나는 우리는> 에도 그런 변화의 순간에 직면한 사람들이 나온다. 달라진 환경이나 입장, 감정 때문에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상황들.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읽기 편했다. 사건의 경위가 구체적으로 적혀있지 않아도, 행간에 숨겨진 사연들이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마치 ‘기승전결’에서 ‘승’이나 ‘전’의 부분만 따로 발췌해 놓은 듯한 구성. 마치 닭 다리로만 이루어진 치킨세트 같은 책이었다. 일주일 동안 출퇴근 길에 매일 한두 꼭지씩 찬찬히 읽어내려가며, 그간 내가 겪었던 변화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그렇게 며칠씩 반복하다 보니,몇 가지 궁금점이 생겼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이 책을 재밌게 읽으셨습니까? 공감하셨나요?
그렇다면 한번 여쭙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은 몇 호입니까?

[도서] 달의 바다

나는 대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취업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토익 점수는 물론, 그 흔한 인턴 경력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진로를 너무 늦게 정한 탓이었다. 그 시기의 나에게 있어 ‘직업’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그때까지 내가 생각했던 ‘직업’이라는 건 어른들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순진하고 막연한 생각이지만 그땐 정말로 그랬다. 스스로 어른이라는 자각이 없었다. 학생이란 신분을 방패 삼아 ‘나는 아직 아이야’하고 자기변명을 하고 있었다. 법적으로는 이미 어른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이인 상태였다. 문득 정신이 들었던 것은 졸업전시가 마무리된 직후였다. 전시를 마치고 철거되는 작품들을 보며 나의 학창시절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부랴부랴 그동안 작업했던 과제와 이런저런 아르바이트 경력, 소소한 공모전 수상실적을 모아보았지만, 그 넓디 넓은 A4 용지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연히 구직활동도 난항이었다. 내가 인사 담당관이었어도 탈락시켰을 법 했다. 그 정도로 그 당시 나의 상태는 애매했고,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엉망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 취업준비생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실 취업준비생이라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일단 아직은 학생이긴 했고, 이전보다 좀 더 취업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취했을 뿐이었다. 당시 나의 대부분 일과는 입사 지원서를 작성하거나,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나머지 시간은 대형 서점에 가서 책을 읽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쓰였다. 중간중간 여행을 떠나기도 했던 것 같다. 살아오면서 나 자신이 가장 쓸모없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바꿔말하면,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던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 자유를 최대한 누리며,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그림을 그렸고, 수없이 스스로를 돌아봤다. 이력서 한줄 감도 못 되는 일들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다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가끔은 그 시기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오늘의 나를 구축한 토대는 그 시절에 다져진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 <달의 바다>에 나오는 주인공의 미국여행기를 보고 있으면, 나의 취업준비생 시절이 생각난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서 의외의 희망을 발견하기도 하는 나날들. 실은 평범한 일상에 불과할 뿐인데, 어쩐지 그 때는 그 하루하루의 의미가 매번 다르게 다가왔었다. 문학 평론가 김현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문학은 무용無用하기 때문에 유용有用하다.”

청춘의 방황도 문학과 비슷한 면이 있지 않나 싶다. 누구에게나, 쓸모없기 때문에 의미 있는 시기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 일행이 미국 여행 후에 각자 나름의 성장을 이뤄냈던 것처럼. 그러니 당장 오늘 당신에게 방황의 순간이 찾아왔다 해도 좌절하지 말기를. 무용해 보이는 시간 속에서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도서] 자기 앞의 생

열 살 무렵,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바로 뒤편에는 판자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판자촌은 우리 집 베란다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였는데, 어린 시절의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판자촌이라는 단어도 생소할 나이였으니까. 어른들은 그곳을 양지마을이라고 불렀다. 양지마을은 우리와 격리된 별세계였다. 양지마을은 우리 아파트 단지보다 낮은 곳에 있었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이름과 다르게 양지마을에는 볕이 들지 않았다. 그들의 앞을 내가 살던 아파트단지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지’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그곳은 너무나 어둡고 축축해 보였다. 매일 같이 베란다에서 그곳을 내려다보면서도, 나는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에서 그런 집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우리가 그곳으로 다니지 못하게 했다. 굳이 어른들의 잔소리가 아니더라도, 애초에 나는 그곳으로 다닐 생각이 없었다. 그곳은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의 눈에도 몹시 지저분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몇 년씩이나 그들과 마주하고 있었으면서도, 한 번도 그들과 마주하지 못했다.

내가 판자촌이라는 개념을 습득한 것은, 우리 가족이 그곳을 떠나고 몇 년이 흐른 뒤였다. 교과서에 실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며, 나는 그들이 행복동 주민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문득 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들이 바라본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들은 아직도 그곳에 남아있을까?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흘러, 개인적인 용무로 양지마을이 있던 그 주변을 지나갈 일이 있었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내가 살았던 동네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양지마을도 예외는 아니어서, 양지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이미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높게 쌓아 올려진 아파트의 옆면에는 보란 듯이 큼지막하게 양지마을이라 적혀 있었다.

<자기 앞의 생>은 나로 하여금 그 시절을 되돌아 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이 책의 주역은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어린 시절 내가 바라보았던 양지마을의 주민들처럼, 우리가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마주하지 못했던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들, 우리가 애써 외면해왔던 이들의 삶을 그들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들려주고 있다.어린아이의 시각이란 건 참으로 무섭다. 불편하고도 무서운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술술 풀어내기 때문이다. 참으로 마음 아픈 구절들이 많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주인공 모모의 의연한 모습을 보며 위안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읽는 내내, 모모와 함께 울고 웃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내달린 것 같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또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지금의 나라면,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도서] 강원국의 글쓰기

2016년의 여름, 나는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내 바로 위 팀장과의 불화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단지 구실에 불과했을 뿐, 흔히 말하는 ‘직장인 사춘기’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내 마음속에서 퇴사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고, 고민은 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언제부터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닐지, 어느 회사에 지원할 것인지, 희망 연봉으로 얼마를 제시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나날이었다. 질문이 거듭됨에 따라, 이직에 대한 고민은 점차 내 인생 전반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되었다. 이직할 때까지 만이 아니라, 이직한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기나긴 질의응답 끝에 남은 마지막 질문 하나. ‘회사원이 아닌 개인으로서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비교적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앞의 질문들과 달리, 이 물음에 대해서만큼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답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답은 ‘0’. 회사원이 아닌 ‘나’의 가치는 ‘0’에 수렴하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의 내 삶에서, 온전히 ‘내 것’이라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회사의 제품’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 ‘회사의 제품’으로 벌어들인 매출과 수익 역시 ‘회사의 것’이었다. 심지어 함께 일하며 동고동락한 동료마저도 ‘나의 동료’이기 이전에 ‘회사의 직원’이었다.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직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 것’을 가지고 싶었다. 회사나 조직에 기대지 않고도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릴 적 나의 꿈은 작가였다. 정확하게는 만화가를 지망했다. 중학교 때는 당시 살던 동네 인근의 만화가 화실에 다닌 적도 있었다. 어설픈 실력에, 단지 남들보다 만화를 좋아할 뿐인 중학생이 화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사실상 견학이었다. 만화가 선생님은 내게 사진 모작을 해보라고 권하셨다. 그렇게 나는 여름방학 내내 화실에 다니며, 매일 2~3장의 사진을 따라 그렸다. 사진을 모작하는 것은 확실히 좋은 연습이 되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내 그림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내가 했던 연습법이 그림쟁이들 사이에서 ‘잡지 떼기’란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잡지 떼기’를 하던 시절로 돌아가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그 때로 돌아가면, ‘내 것’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시작했다. 우선 주말을 이용하여, 구글에서 찾은 인물사진을 따라 그려보았다. 손이 굳었는지, 간단한 포즈였음에도 5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확실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날에도 나는 퇴근 후, 구글에서 맘에 드는 사진을 골라 모작했다.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에도 습작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나의 ‘잡지 떼기’ 수련은 1주년을 맞이했다. 습작은 200장 가까이 쌓였고, 나름대로 필력도 올라가 2-3시간이면 왠만한 사진을 따라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스스로가 대견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잡지 떼기’는 분명 좋은 수련법이었지만, ‘내 것’을 만드는 작업은 아니었다. 단순한 ‘사진모작’이상의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무작정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침 어떤 이야기의 도입부가 떠올랐는데, 망설이다간 영영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마구 그려나갔다. 습작할 때 세웠던 ‘하루 1모작’의 규칙은 ‘하루 1컷’으로 변모했다. 작업 속도는 끔찍하게 느렸다. 대략 1주일에 2~3페이지 정도를 그렸던 것 같다. 답답한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정해진 마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당장 생계가 곤란한 것도 아니었다. 직장과 병행하기엔 그 정도의 속도가 딱 맞았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나는 6개월여의 처절한 산통 끝에 50페이지짜리 단편원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원고였지만, 내게 있어 작품의 완성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딘가로부터 청탁을 받거나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다.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작업이었다.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듯한 짜릿한 성취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제야 비로소 ‘내 것’이 생긴 느낌이었다.

<강원국의 글쓰기>를 읽는 동안, 저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글쓰기든 만화든 창작계통은 어느 정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잘은 몰라도, 음악이나 인터넷방송을 했어도 그 전반적인 과정의 윤곽은 비슷했을 것이다. 나는 원래 <강원국의 글쓰기>와 비슷한 종류의 자기계발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뻔하고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걸 누가 몰라서 못하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읽다 보면 약 올리는 것 같았고, 읽고 난 후엔 치졸한 자기변명만이 남았다. 하지만 ‘잡지 떼기’를 다시 시작한 이후, 더는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그래, 아직 잘하고 있어’하고 격려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아직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단지 이제 막 출발선에 섰을 뿐임을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다시 레이스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아직 쓰고 싶은 이야기가, 쓰지 못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

[도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생각 하나.

3년 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가족의 죽음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직 젊고 건강하기에 딱히 진지하게 고민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분명 그랬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외할머니의 부고를 전해 듣고서도 한동안 실감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장례식장에서도 사흘 동안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발인할 때쯤에서야 눈물을 터뜨렸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내며 내가 느꼈던 건 죽음의 무게였다. 그건 달리 말하면, 삶의 무게이기도 했다.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신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그제야 알았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으면서, 그 때의 일이 많이 생각났다. 사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 사례는 내 외할머니의 경우와 다소 거리가 있긴 하다. 이 책에 실린 몇몇 극단적인 사례와 비교해보면, 외할머니께서는 비교적 평온한 임종을 맞이하셨다. 다만 그럼에도 계속 마음에 남는 한 가지 아쉬움은, 외할머니께서 영면하시던 그 순간까지도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께서 원하시던 삶과 죽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 ‘죽음’에 대해 언급하길 꺼리는 우리 고유의 관습 때문이었을 것이다.과연 외할머니는 당신께서 바라셨던 형태의 죽음을 맞으셨던 것일까? 요즘에도 가끔 궁금해 지곤 한다.

생각 둘.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야지’ 어릴 적부터 줄곧 그려왔던 내 죽음의 모습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비장에 찬 예술가의 결의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다. 단지 ‘늙어서 은퇴하면, 시간이 남아돌 테니 그때 가서 마음껏 해보고 싶었던 걸 해봐야지’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을 읽으면서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창작과 같은 정신적인 활동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점점 더 잘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스필버그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거장들이 70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며 당연하게 여긴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노환으로 고생하시는 할머니를 보며 건강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를 체감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도 서서히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닮아갈 것이다. 펜이나 붓, 아니 어쩌면 자판 치는 일조차도 버거운 날이 올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지금까지의 인생관이 살짝 흔들렸다. 젊음과 건강을 소중히 여겨야지. 젊고 건강한 이 순간을 최대한 누려야지. 이 책의 저자가 말하려던 게 이런 이야기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곱씹을수록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죽음이나 늙음에 대해 고민하기엔 난 아직도 많이 젊다. 갑자기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도서] 강신주의 감정수업

소설가 김연수가 말하길,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형태와 색의 세밀한 차이를 본다는 뜻’이라고 했다.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색의 종류를 아는 대로 말해보라 하면, 어떤 이는 빨강, 노랑, 파랑을 말할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빨주노초파남보를 말할 것이다. 만약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10가지나 20가지 이상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색을 정의하는 데 있어 정해진 규칙은 없다. 애초에 색이라는 것 자체가 빛의 파장을 편의에 따라 멋대로 분류해 놓은 개념에 불과하니까. 사람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간단하게 분류하면 희로애락으로 퉁칠 수도 있겠지만,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로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스피노자는 그의 저서 <에티카>에서 인간의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했다고 한다.인간의 감정을 단순히 희로애락으로 분류하는 것과 48가지로 분류하는 것에는, 3색 크레파스와 64색 크레파스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앞서 인용한 김연수 작가의 표현을 응용한다면, ‘사람을 탐구한다는 건 감정의 세밀한 차이를 본다는 뜻’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3색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과 64색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의 깊이가 다르듯, 희로애락의 감정만 알고 사는 삶과 48가지의 감정을 인지하고 있는 삶의 깊이 역시 크게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는 향후 정보화 사회가 고도화됨에 따라 더욱 심화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거의 모든 것이 공개돼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하루하루는 시작부터 끝까지 공유되고 공개됩니다. 웹과 인터넷, 거리의 CCTV, 우리가 소비한 흔적 하나하나가 다 축적되어 빅데이터로 남습니다. 직장은 우리의 영혼까지 요구합니다. 모든 것이 ‘털리는’ 시대. 그러나 책으로 얻은 것들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독서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 내면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 김영하, 산문집 <말하다> 중에서 –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소한 용어였던 빅데이터는 어느덧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침투하여 보편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정교한 빅데이터에 의해 교묘하게 설계된 광고와 마케팅, 프로파간다는 매 순간 우리 눈앞에 노출되고 있으며, 우리의 의식과 행동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빅데이터를 쥐고 있는 기업과 정치세력, 언론이 우리의 물질뿐 아니라 정신세계까지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이나 D-War 열풍과 같은 사건들을 통해 인터넷 여론몰이의 폐해를 경험한 바 있다. 대중들이 냉정하게 느끼고 판단했다면, 그런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벌어졌더라도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제2의 황우석과 D-War가 더욱 치밀한 방식으로 자라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때일수록 타인의 소리보다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잘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김영하 작가가 말한 ‘내면을 구축’하는 행위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느끼는 행위는 주체적 사고로 이어지며, 이는 곧 특정한 권위나 군중심리에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에 보이는 사물에서부터 추상적인 개념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온갖 것에 다 이름을 붙여왔다. 이름이 있는 쪽이 여러모로 훨씬 다루기 편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감정을 48가지로 정의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감정에 대해 명료하게 정의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더욱 수월하게 느낄 수 있으며, 이는 내면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것이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이유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스피노자가 정의한 48가지의 감정을 문학작품에 빗대어 설명해주는, 일종의 해설서다. 몇몇 부분에서의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 일부 독자에게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이해하기 쉽도록 명쾌하게 서술되어 있다. 48가지 감정 중 낯설거나 새로운 개념은 없다. 대신 몇몇 감정들은 그 차이가 다소 모호한데, 저자는 그 차이점을 명확하게 짚어 구분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랑과 끌림이 어떻게 다르며, 치욕과 수치심이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식이다.

스피노자가 분류한 48개의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 접한 64색 크레파스만큼이나 경이롭다. 인간의 감정이 저렇게 다양했단 말인가? 희로애락이 감정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그 놀라움이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가 분류한 48가지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의 감정분류가 가지는 의의는 그 시도 자체에 있지 않았을까? 인간의 감정을 수십 가지로 분류해보는 일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엔 더더욱 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그 결과물보다 발상 자체가 큰 의미로 다가온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누이트 족 사람들은 눈(雪)의 색과 형태를 수십 가지로 분류한다고 한다. 이는 그들이 설원에서 생존하는 데 있어 눈의 종류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원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러한 분류는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각자의 처지나 환경, 개성 등에 따라 각각 다른 감정분류가 필요한 건 아닐까? 어쩌면, 감정을 분류하는 데 있어 보편적인 기준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내용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이 책의 내용을 참고삼아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감정을 정리해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그 결과물이 스피노자에 비해 다소 미숙하더라도, 그러한 경험은 자신의 내면을 구축하는 데 있어 보다 주효한 양분으로 작용할 것이다.

Posts navigation

1 2 3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