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서양 철학자 중 한 명일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로 대표되는 그의 어록이 수시로 인용되는 것만으로도, 대중들 사이에서의 그의 인지도와 입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인지도가 무색하게도, 막상 소크라테스의 삶과 그의 최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많다. 대표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그랬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게 된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내 지식의 여백을 채울 수 있었던 귀중한 경험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1차 판결 전 연설과 2차 판결 전 연설, 사형이 확정된 후의 최후 연설,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세 차례의 연설은 다소 시점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아테네인들을 향한 소크라테스의 절박한 탄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정독하며, 내가 떠올린 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가짜 뉴스와 여론재판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집행으로부터 25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그의 죄목에 비해 과도한 형벌을 받았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2차 판결에서 소크라테스가 360 대 140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 판결을 받았던 걸 보면, 당시 아테네인들의 눈에는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아마 당시에 소크라테스를 모함한 이들의 명망이 우리의 예상 이상으로 높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당시 소크라테스의 명성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아테네인들의 시각에서 이 연설문을 읽지 못하는 점이 참으로 아쉽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오늘 날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각종 가짜 뉴스와 여론 재판에 이를 대입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는 시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스스로의 사고를 객관적인 것이라 믿고, 보고 싶은 걸 보고 듣고 싶은 걸 들을 뿐이다. 그 결과는 때때로 옳은 판단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그른 판단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과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은 소크라테스의 최후 변론에서도 언급되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난 날의 소크라테스와 오늘날의 소크라테스, 그리고 앞으로 있을 내일의 소크라테스들을 떠올리며, 무엇이 정의인지 다시 한번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