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산을 포함한 세상 만물이 10년 단위로 크게 변한다고 믿는다. 물론 삶 또한 예외가 아니다. 수많은 통계와 조사 자료에서 사람의 연령대를 10대, 20대, 30대 등으로 나누는 것은 단순한 편의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0대에 있었던 가장 큰 변화는 사춘기였다. 몸의 변화가 먼저 찾아왔고, 곧 정신의 변화가 뒤따라왔다. 처음으로 꿈과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대부분은 망상이었지만, 어떤 지향점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방향에 대한 부모님의 간섭이 없어 좋았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좋고 나쁜 일이 있었지만, 대다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적어도 크게 후회할만한 일은 없었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스무살에 일어난 변화는 10대에 있었던 변화보다 여러모로 극적이었다. 우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었고, 시간표를 마음대로 짤 수도 있었다. 수업시간엔 동갑내기 외에 다양한 나이와 개성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했다. 대학생으로서 맞이한 이 모든 변화가 생경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음주와 흡연을 비롯한 각종 유흥이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그 시절, 나는 술자리에 탐닉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그 무렵 있었던 학과 내 술자리엔 빠짐없이 모두 참석했던 것 같다. 입학 동기보다는 학과 선배와의 술자리가 더 좋았다. 일단 술값이 들지 않았고, 선배들은 새파랗게 어린 후배의 실수에 관대했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더 귀엽게 봐주기도 했다. 나 역시 나보다 몇 년을 앞서 학교를 다닌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수많은 술자리에 참석하면서, 여러 선후배들과 어울렸고, 스스로도 내가 사람을 꽤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때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의 세계가 크게 팽창하고 있었다.
30대를 맞이하며 겪은 변화 중 하나는 더 이상 불필요한 술자리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불필요’의 기준은 오롯이 나의 마음이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굳이 가지 않는다. 심지어, 직장에서의 회식도 가기 싫으면 적당한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간혹 내게 섭섭해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자리엔 참석했으므로, 내 입장에선 만족스러웠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고, 그 대신 스스로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미래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이렇게 적어 놓은 걸 보면, 마치 내 20대가 무의미한 방황의 시절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오히려 나의 20대는 스스로에 대한 치열한 탐색전의 시간들이었다. 술만 마셨던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내 짧은 삶을 통틀어 가장 유의미한 인연과 담론은 모두 20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궁핍하고, 처절한 순간의 연속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매순간이 빛났다. 당연히 후회나 미련도 없다. 10대가 신체의 성장기였다면, 20대는 정신의 성장기였다. 법적으로는 스무 살에 성인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서른 살에 성인이 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박준 시인의 에세이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으며, 내 지난 20대 시절을 떠올렸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으로, 음울함이 감돌았지만, 어쩐지 우울하지만은 않았던 그 시절. 사람을 좋아했지만, 사람 때문에 상처받아야 했던 그 시절. 그리고 그런 나날을 보내고,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지금. 이 모든 순간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실감했다. 책 제목처럼,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오늘까지 나아올 수 있었다. 이제껏 내가 겪어왔던 모든 희노애락의 순간들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