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는 “인간의 불행은 인류의 농업혁명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농사는 잉여식량을 만들어냈고, 잉여식량은 빈부의 차이를 만들어냈으며, 빈부의 차이는 계급갈등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다. 그런 맥락에서, ‘빈부격차’는 곧 ‘신분격차’와 상통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이 생겨난 이래로 인류는 항상 신분 상승을 갈망해왔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늘 적잖은 좌절을 겪기 마련이고, 그렇게 억눌린 욕망은 다시 이야기를 통해 표출된다. 이 때, 이야기는 훌륭한 대리만족과 정신승리의 수단으로 거듭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 속 부자(혹은 권력자)들은 대개 악하게 그려진다. 그래야 그들을 해치는 행위가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야기 속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착하다. 이같은 ‘나쁜 부자(권력자) 대 착한 약자’의 구도는 고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반복변주되어 왔다. 수차례 봐온 이야기임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나쁜 부자들이 쓰러지는 장면에 열광한다. 현실에서 느끼기 힘든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의 흥행은 이를 방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베테랑>은 매우 쉬운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선량한 노동자’와 ‘사악한 재벌 3세’, ‘정의로운 경찰’이 등장한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어떤 이야기인지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몇몇 장면에서는 실제 사건을 차용하여 일정한 현실감을 부여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정의로운 경찰이 사악한 재벌 3세를 때려잡으며 마무리된다. 우리는 이 영화가 전형적인 권선징악 판타지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에 빠져들고 열광하며 환호한다. 그런 일이 현실에도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1300만 관객이라는 이 영화의 스코어는, 대중들이 가진 열망의 크기를 대변하는 듯 하다.
한편, 박찬욱 감독은 중편 영화 을 통해, ‘나쁜 부자’와 ‘착한 약자’의 관습적인 구도를 뒤집어 버린다. 의 주인공 류지호는 재능있고 부유한 인기 영화감독이다. 그는 인품도 훌륭해서, 말단스태프에게도 결코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다. 어느 날, 그의 집에 괴한이 침입한다. 괴한은 류지호를 위협하며, 류지호에게 악행을 저지르라고 강요한다. 패닉상태의 류지호는 괴한에게 묻는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괴한은 대답한다. 나는 당신처럼 돈 많고 잘난 사람이 착하기까지한 게 마음에 안 들어. 황당한 범행 동기지만 관객들은 이내 수긍한다. 괴한은 오랜 가난으로 이미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독특한 관점은 메이킹 필름에 수록된 그의 코멘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은 너무 착해서 내가 견딜 수 없다’라는 그것이 출발이에요. 내가 살면서 잘 사는 사람, 부자들, 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을 더러 만날 때가 있는데, 옛날에 우리 부모 세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악독하고…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근데 요즘에는 아닌 거 같아요. 잘 사는 사람이 착하기도 한 경우가 더 많아요.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은 성격까지 더 삐뚤어지기 쉬운 세상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시작된 이야기죠.
최근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또한 이와 비슷한 발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약자 대 약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기생충으로 은유되는 영화속 빈곤층은,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는다. 영화 속 부자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악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애초에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고,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을 굳이 미워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이들은 기생충들의 싸움에 휘말려 희생되는 무고한 숙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약자 대 약자’의 싸움이 벌어진다. 선량한 흑인 톰 로빈슨은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 재판에 회부된다. 톰 로빈슨을 신고한 이는 밥 유얼이라는 이름의 백인 남성이다. 밥 유얼은 지독한 극빈층으로, 흑인 빈민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흑인들에 비해 나은 점은, 인종차별이 있던 시대에 백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뿐이다. 밥 유얼은 톰 로빈슨이 자신의 딸을 겁탈했다고 주장한다. 톰 로빈슨과 밥 유얼은 사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밥 유얼은 이를 부정하고 싶어한다. 그는 어떻게든 톰 로빈슨을 저 밑으로 끌어내려서, 적어도 자신이 흑인들보다는 나은 존재임을 증명하려 한다. 그에 비해, 애티커스 핀치로 상징되는 백인 지식인들은 오히려 톰 로빈슨에게 호의적이다.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어떤 것이 정의로운 행동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과 <앵무새 죽이기>가 보여주는 ‘약자 대 약자’의 갈등구조는 소름끼칠 정도로 현실적이고, 일상적이다.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대부분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직장 상사나 동료, 부하, 가족, 친구와의 갈등은 일상적이지만, 재벌총수나 대통령같은 사람들과의 갈등은 어딘가 비현실적이다. 갈등은 커녕, 애초에 그런 사람들을 한 번 만나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우리는 평생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반대로 주변의 누군가에게 미움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선과 악은 지극히 상대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톰 로빈슨과 밥 유얼의 모습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전에 자신의 발밑부터 먼저 돌아보길 권한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발이 다른 누군가의 등이나 어깨, 혹은 정수리를 밟고 있을지도 모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