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미술 선생님이었다. 중학교에서 10여년간 아이들을 가르치시다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미술학원을 개원하셨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장소가 바뀌긴 하였으나, 아버지가 미술 선생님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고, 내가 미술 선생의 아들인 것도 변함없었다. 아버지가 미술 선생님이시긴 했지만, 나는 그에 따른 수혜를 거의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시는 일이 좀처럼 없었고, 당연히 당신의 자녀들에게 특별한 기술이나 기법을 전수하는 일도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가 미술을 전공하길 바라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유는 뻔했다. 한국 대다수의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삶을 되물림하길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라면서 미술과 관련된 기술들을 하나 둘 습득해 나갔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미술과 관련해서만큼은 언제나 주변의 아이들보다 빨랐다. 흔히 말하는 재능이나 자질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런 것보다도 ‘미술가의 아들’이라는 내 내면의 자의식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모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자식들은 결국 부모의 등을 보며 자라기 마련이다.
내가 교실 한 켠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 내가 그림그리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아이들에게 관심받는 것을 좋아했다. 내게 있어 그림은, 친구를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다른 반 친구들도 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였다. 초등학생 시절의 내 장래 희망은 화가였다. 언젠가 위인전에 실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엔 디자이너나 만화가에 대한 위인전이 없었다. 그러다 열 살 무렵에 <드래곤볼>을 보게 되었고, 좀 더 커서는 <슬램덩크>를 보게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나의 장래희망은 만화가로 바뀌어 있었고, 그 이후로도 줄곧 나의 꿈은 만화가였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나의 위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확고했다. 나는 중학교에서도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 나는 내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대로 어른이 되면, 그대로 만화가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등학교,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나는 근거없는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아직 진로조차 정하지 못한 또래들에 비해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무방비로 20대를 맞이했고, 무방비로 20대를 허비했다. 아마 내게도 몇번의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그중 일부는 알면서도 잡지 못했고, 나머지는 몰랐기 때문에 잡지 못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대학교 졸업반이었다. 나는 미련없이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꿈을 추구한 대가로 불행한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고흐의 그림을 좋아했지만, 고흐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무방비 상태로 20대를 보낸 덕분에 취업은 쉽지 않았고, 학교 선배의 도움으로 들어간 첫 회사는 형편없었다. 가까스로 1년을 채우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회사를 나와 내가 향한 곳은 결국 다시 ‘만화’였다. 마침 그 시기에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공모전이 열리고 있었다. 재취업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띄워보고 싶었다. 이번에 안 되면, 앞으로 만화 쪽엔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나는 석달간의 준비 기간을 설정하고, 그 기간동안 공모전에만 매진했다. 그야말로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보기 좋게 낙방했다. 의외로 비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좌절이라기 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어쩌면 스스로도 결과를 직감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은 듯 툴툴 털어내고 곧 재취업을 했다. 다행히도, 두번째 회사는 이전 회사에 비해 훨씬 좋은 곳이었다. 나는 그간의 긴장을 풀고, 한동안 여유로운 직장인의 삶을 만끽했다.
그렇게 몇년의 시간이 지나고 안정이 찾아올 무렵,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의 사건과 계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건 앞서 열거한 에피소드들에 비해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나는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회사생활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지난 날의 그 어느 순간보다도 진지하게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나는 운명 혹은 필연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소설가 김영하의 에세이 <앞에서 날아오는 돌>에서, 한 점쟁이는 젊은 시절의 김영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입니다.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고 다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힘이 들지요.”
나는 이 비유가 퍽 맘에 들었다. 삶이란, 날아오는 돌을 피하는 것 만큼이나 녹록치 않은 일이다. 알면서도 실패하고, 모르는데도 성공하곤 한다. 운명이나 숙명같은 단어도 그런 연유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운명과 숙명이 얽혀 사회가 만들어지고, 이야기가 탄생한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운명과 분노>를 읽으며, 어떤 글을 쓰면 좋을지 적잖은 고민을 했다. 운명론, 페미니즘, 수저계급론 등 다양한 소재를 두고 갈팡질팡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은 모두 지엽적인 논점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하나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새터화이트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운명 파트와 분노 파트의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것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된다. 본래 역사란, 관점의 학문이니까. 로토와 마틸드의 열전을 보면서, 나도 나의 역사를 한 번쯤 정리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