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어슐러 K. 르귄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13년 전쯤, 스튜디오 지브리의 신작 애니메이션 <게드전기>의 개봉 소식을 접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지브리에게 있어 <게드전기>는 여러모로 중요한 지점에 있는 작품이었다.지브리의 수장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의 첫 연출작이었기 때문이다. 세간의 이목은 미야자키 고로가 과연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할 수 있을지에 쏠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도무지 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혹평이 쏟아졌고, 2대 세습을 도모한 미야자키 부자 역시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순 없었다. 이후 지난한 흥행부진의 침체를 겪던 스튜디오 지브리는 결국 2014년 해체 발표를 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쇠락이었다.
<게드전기>는 어슐러 K. 르귄의 <어스시 연대기> 중 세 번째 작품인 <머나먼 바닷가>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원작과 여러 부분에서 상이해서, 원작자인 어슐러 K. 르귄은 영화를 보고, “이것은 내 책이 아니다, 고로의 영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어슐러 K. 르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 지점에서부터였다. ‘영화는 형편없었는데, 원작은 많이 다른가?’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조금 더 알아보니, 어슐러 K. 르귄의 대표작 <어스시 연대기>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더불어 3대 판타지 문학으로 꼽힌다고 한다. 아아, 원작은 굉장히 좋은 작품이었겠구나. 이 쯤되면 한 번 찾아서 읽어봤을 법도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책을 읽지 않는 청년이었다. 그렇게 13년이 흘렀다.
우연치 않게 독서모임에서 어슐러 K. 르귄의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이 모임용 도서 후보로 거론되었다. 나는 13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바람의 열두 방향>에 한 표를 던졌다. 나의 불찰이었다. 책장을 펼쳐 몇 페이지를 정독한 후의 감상은 ‘큰일 났다’였다. 내용 이전에, 번역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았다. 어휘 사용이 어색한 건 둘째치고라도, 군데군데 비문도 적잖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이 책이 단편집이라는 것과 이야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뿐 아니라 각 단편에 삽입된 작가의 머리말에도 의미심장한 구절이 여럿 있었다. 몇몇 이야기는 통속적이었지만, 또 몇몇 이야기는 꽤 신선했다. 개인적으로는 <샘레이의 목걸이>와 <아홉 생명>, <물건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독특한 설정과 전개로 창작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었다.
결과적으로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이번 기회에 읽은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독서모임용 책으로 적합했는지는 조금 의문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