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무렵,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바로 뒤편에는 판자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판자촌은 우리 집 베란다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였는데, 어린 시절의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판자촌이라는 단어도 생소할 나이였으니까. 어른들은 그곳을 양지마을이라고 불렀다. 양지마을은 우리와 격리된 별세계였다. 양지마을은 우리 아파트 단지보다 낮은 곳에 있었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이름과 다르게 양지마을에는 볕이 들지 않았다. 그들의 앞을 내가 살던 아파트단지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지’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그곳은 너무나 어둡고 축축해 보였다. 매일 같이 베란다에서 그곳을 내려다보면서도, 나는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에서 그런 집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우리가 그곳으로 다니지 못하게 했다. 굳이 어른들의 잔소리가 아니더라도, 애초에 나는 그곳으로 다닐 생각이 없었다. 그곳은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의 눈에도 몹시 지저분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몇 년씩이나 그들과 마주하고 있었으면서도, 한 번도 그들과 마주하지 못했다.
내가 판자촌이라는 개념을 습득한 것은, 우리 가족이 그곳을 떠나고 몇 년이 흐른 뒤였다. 교과서에 실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며, 나는 그들이 행복동 주민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문득 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들이 바라본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들은 아직도 그곳에 남아있을까?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흘러, 개인적인 용무로 양지마을이 있던 그 주변을 지나갈 일이 있었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내가 살았던 동네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양지마을도 예외는 아니어서, 양지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이미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높게 쌓아 올려진 아파트의 옆면에는 보란 듯이 큼지막하게 양지마을이라 적혀 있었다.
<자기 앞의 생>은 나로 하여금 그 시절을 되돌아 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이 책의 주역은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어린 시절 내가 바라보았던 양지마을의 주민들처럼, 우리가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마주하지 못했던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들, 우리가 애써 외면해왔던 이들의 삶을 그들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들려주고 있다.어린아이의 시각이란 건 참으로 무섭다. 불편하고도 무서운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술술 풀어내기 때문이다. 참으로 마음 아픈 구절들이 많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주인공 모모의 의연한 모습을 보며 위안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읽는 내내, 모모와 함께 울고 웃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내달린 것 같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또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지금의 나라면,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