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강신주의 감정수업

2018년 9월 22일

소설가 김연수가 말하길,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형태와 색의 세밀한 차이를 본다는 뜻’이라고 했다.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색의 종류를 아는 대로 말해보라 하면, 어떤 이는 빨강, 노랑, 파랑을 말할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빨주노초파남보를 말할 것이다. 만약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10가지나 20가지 이상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색을 정의하는 데 있어 정해진 규칙은 없다. 애초에 색이라는 것 자체가 빛의 파장을 편의에 따라 멋대로 분류해 놓은 개념에 불과하니까. 사람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간단하게 분류하면 희로애락으로 퉁칠 수도 있겠지만,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로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스피노자는 그의 저서 <에티카>에서 인간의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했다고 한다.인간의 감정을 단순히 희로애락으로 분류하는 것과 48가지로 분류하는 것에는, 3색 크레파스와 64색 크레파스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앞서 인용한 김연수 작가의 표현을 응용한다면, ‘사람을 탐구한다는 건 감정의 세밀한 차이를 본다는 뜻’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3색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과 64색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의 깊이가 다르듯, 희로애락의 감정만 알고 사는 삶과 48가지의 감정을 인지하고 있는 삶의 깊이 역시 크게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는 향후 정보화 사회가 고도화됨에 따라 더욱 심화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거의 모든 것이 공개돼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하루하루는 시작부터 끝까지 공유되고 공개됩니다. 웹과 인터넷, 거리의 CCTV, 우리가 소비한 흔적 하나하나가 다 축적되어 빅데이터로 남습니다. 직장은 우리의 영혼까지 요구합니다. 모든 것이 ‘털리는’ 시대. 그러나 책으로 얻은 것들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독서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 내면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 김영하, 산문집 <말하다> 중에서 –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소한 용어였던 빅데이터는 어느덧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침투하여 보편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정교한 빅데이터에 의해 교묘하게 설계된 광고와 마케팅, 프로파간다는 매 순간 우리 눈앞에 노출되고 있으며, 우리의 의식과 행동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빅데이터를 쥐고 있는 기업과 정치세력, 언론이 우리의 물질뿐 아니라 정신세계까지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이나 D-War 열풍과 같은 사건들을 통해 인터넷 여론몰이의 폐해를 경험한 바 있다. 대중들이 냉정하게 느끼고 판단했다면, 그런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벌어졌더라도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제2의 황우석과 D-War가 더욱 치밀한 방식으로 자라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때일수록 타인의 소리보다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잘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김영하 작가가 말한 ‘내면을 구축’하는 행위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느끼는 행위는 주체적 사고로 이어지며, 이는 곧 특정한 권위나 군중심리에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에 보이는 사물에서부터 추상적인 개념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온갖 것에 다 이름을 붙여왔다. 이름이 있는 쪽이 여러모로 훨씬 다루기 편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감정을 48가지로 정의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감정에 대해 명료하게 정의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더욱 수월하게 느낄 수 있으며, 이는 내면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것이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이유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스피노자가 정의한 48가지의 감정을 문학작품에 빗대어 설명해주는, 일종의 해설서다. 몇몇 부분에서의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 일부 독자에게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이해하기 쉽도록 명쾌하게 서술되어 있다. 48가지 감정 중 낯설거나 새로운 개념은 없다. 대신 몇몇 감정들은 그 차이가 다소 모호한데, 저자는 그 차이점을 명확하게 짚어 구분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랑과 끌림이 어떻게 다르며, 치욕과 수치심이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식이다.

스피노자가 분류한 48개의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 접한 64색 크레파스만큼이나 경이롭다. 인간의 감정이 저렇게 다양했단 말인가? 희로애락이 감정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그 놀라움이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가 분류한 48가지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의 감정분류가 가지는 의의는 그 시도 자체에 있지 않았을까? 인간의 감정을 수십 가지로 분류해보는 일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엔 더더욱 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그 결과물보다 발상 자체가 큰 의미로 다가온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누이트 족 사람들은 눈(雪)의 색과 형태를 수십 가지로 분류한다고 한다. 이는 그들이 설원에서 생존하는 데 있어 눈의 종류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원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러한 분류는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각자의 처지나 환경, 개성 등에 따라 각각 다른 감정분류가 필요한 건 아닐까? 어쩌면, 감정을 분류하는 데 있어 보편적인 기준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내용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이 책의 내용을 참고삼아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감정을 정리해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그 결과물이 스피노자에 비해 다소 미숙하더라도, 그러한 경험은 자신의 내면을 구축하는 데 있어 보다 주효한 양분으로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