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교에 진학하던 무렵, TV에서는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청춘 시트콤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시트콤에서 그려진 대학생들의 일상은 그야말로 낭만 그 자체였다. 근사한 곳으로 놀러다니거나, 예쁘고 잘생긴 친구들을 만나 삼각관계에 빠지거나, 어쩌다 힘든 일이 생겨도 친구들의 우정으로 으쌰으쌰하며 이겨내는, 그런 달콤한 것이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 내게도 저런 일들이 벌어지겠구나 싶었다. 현실을 깨닫는 데는 입학하고서 한 학기가 채 걸리지 않았다. 일단 과제가 너무 많았고, 과제 외에 신경써야 하는 학교 행사도 많았고,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나가는 지출도 많아졌다. 1학년을 마칠 무렵, 나는 TV에 나오던 선남선녀들과 달리 구질구질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2학년이 되니 상황은 한층 심해져, 과제는 더 많아졌고, 어쩌다 보니 학생회 일까지 맡게되었다. 점점 늘어나는 지출을 감당할 수 없어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시작해버린 이상 중도에 쉽게 관둘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망가져가고 있었다.과제는 간신히 제출만 하고 있는 수준이었고, 학생회 일은 엉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르바이트라고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여기 저기 분주히 뛰어다녔지만, 실상 뭐 하나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없었다. 육체적 피로에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해, 나의 심신은 만신창이였다. 빠쁜 일상 속에서 나는 서서히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고갈되어 가던 그 해의 학교는 개교 60주년을 맞아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 한가지는 해외 자매결연 학교에 학생들을 보내 교류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해당 프로그램에 선발되기 위해서는 팀단위의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거쳐야 했다. 자매학교 교류 프로그램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해외여행을 학교에서 보내준다는 말과 다름 없었다. 당연히 경쟁이 치열했다. 우리 단과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학과 복도를 거닐면 여기저기서 팀원 모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미 지쳐있던 내게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었다. 해외여행같은 건 이제껏 가본 적도 없었고, 만약 가게 되더라도 당장 내 앞에 놓여진 일들이 신경쓰일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친하게 지내던 동기 누나가 지나가듯 ‘우리 이거 지원할 건데 관심있어?’하고 내게 제안했다. 난 멋쩍게 웃으며, ‘그거 괜찮겠네요.’라고 대답했다. 내 딴에는 완곡한 거절 내지는 보류의 의미로 했던 말이었다. 어차피 당시엔 구상단계였을 뿐이고, 차후에 인원을 확정할 시기가 되면 나한테 다시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다.
이미 그 시점부터 난 그 팀에 포함되어 있었고, 팀의 다른 사람들은 내가 팀에 들어간 상황을 전제로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내가 대답했던 시점으로부터 일주일 가량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학생회 일을 떠맡았을 때도, 다른 사람이 하던 아르바이트를 넘겨받을 때도, 이렇게 애매하게 우물쭈물하다 넘겨받기 일쑤였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했던 나의 고난들은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거절해야 할까?’라고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고 마감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차피 마감이 얼마 안 남았으니 프레젠테이션 때까지만 열심히 도와보자고 생각했다. 다행이었던 것은 우리 팀에서 리더격을 맡고 있던 두 복학생 형들이 전년도 학생회 멤버였다는 것이다. 형들은 나의 고충을 이해하고 많이 배려해줬다. 덕분에 우리 팀은 큰 불화없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수 있었다. 만약 프레젠테이션이 잘 되서 해외여행을 준비하게 된다면, 이래저래 골치 아파질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일단 되고 나서 고민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만 통과해버렸다.
순간 들었던 생각은 ‘어쩌지?’ 였다. 학생회 일은? 아르바이트는 어쩌지? 계획에 없던 새로운 상황이 또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일단 이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기뻐하시며, 잘 다녀오라고 하셨다. 기뻐하시는 부모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걱정할 일이 아니었구나. 기쁜 일이었구나. 그냥 잘 다녀오면 되겠구나 하고.
그렇게 나의 첫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어보고, 국제 학생증을 발급받아보고, 항공권을 끊어봤다. 공항 리무진은 기대와 다르게 버스처럼 생겨서 실망스러웠지만, 처음 가본 인천 공항은 매우 넓고 쾌적했다. 우리가 찾아갈 자매학교는 핀란드의 UIAH라는 학교였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디자인 학교라고 한다. 우리의 계획은 이 학교를 방문하는 김에 사비를 좀 더 보태어 스웨덴, 노르웨이까지 구경하는 것이었다. 20여일의 일정이었다. 당시엔(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핀란드로 가는 직항 항로가 없어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서 가야 했는데, 그러다보니 헬싱키까지 가는데만 17시간이 걸렸다. 상당히 긴 비행시간이었지만, 난 첫 비행의 흥분감에 한 시도 잠들지 못했다. 창가에 앉아 하늘을 보다 그림을 그리고, 다시 하늘을 보다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뭐 그랬다. 그렇게 17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우리들은 북유럽에 첫 발을 내딛었다. 헬싱키에서 7일, 스톡홀름에서 3일, 오슬로에서 3일, 보스에서 3일, 다시 헬싱키로 돌아와 3일을 보내는 일정이었다. 여행지에서도 복학생 형들은 곧 군대 갈 놈이 불쌍하다며, 나를 많이 챙겨 주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돌이켜 보면 더더욱 고마운 일이었다. 크고 작은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지만,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단연 프람행 유람선에서 보았던 피요르드 해안이었다. 그곳에는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북유럽만의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멍하니 경치를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어떤 이야기가 떠올랐다. 프람에서 기차로 갈아타 보스로 향하는 동안, 나는 유람선에서 떠올렸던 이야기를 여행일지에 적어보았다. 신기하게도 막힘 없이 단숨에 이야기가 나왔다. 해와 달에 관한 동화였는데, 지금 보면 다소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나름 그럴듯한 이야기였다.(사실 난 지금도 이 이야기가 매우 맘에 든다.) 처음해보는 경험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제 내가 더 이상 고갈되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때 내가 경험했던 20여일의 여정은 온전히 그 순간만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행하는 인간 (Homo Viator)>을 읽는 내내, 나의 첫 해외여행이 생각났다. 책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하면, 그저 요새 유행하는 여행 예찬 도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타 다른 여행 도서와 다른 점이라면, 저자가 자신의 전공을 살려, 여행의 심리학적 의미를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내가 처음 여행을 떠났던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그 당시의 나를 진단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정말로 적절한 시기에 여행을 갔었구나, 나와 함께 여행을 갔던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구나,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이러이러한 것들을 얻었겠구나, 하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근 10년 만에 당시에 작성했던 여행일지를 꺼내 보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뜬금없지만, 일지를 작성해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 대한 긴 썰을 풀고 나니, 몸이 근질거린다. 슬슬 다시 여행을 떠날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