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생길 때마다 16밀리 필름을 사서 냉장고에 저장하라. 매일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필름에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 당신은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1994년 박찬욱과의 인터뷰 중에서-
위에 인용한 타란티노의 어록을 비롯해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감독의 길> (최근에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이나 김영하의 산문집 <보다>, <말하다>, <읽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류승완의 본색>,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과 같은 에세이를 나는 무척이나 좋아한다. 이러한 저작들은 작가들의 삶 그 자체가 매우 훌륭한 이야깃거리임을 증명한다. 이들이 독자들을 향해 말하는 바는 대체로 비슷하다. 첫번째, 일단 실행할 것. 두번째, 꾸준히 정진할 것. 결국 이야기를 쓰는 데 있어 중요한 덕목은 번뜩이는 영감이나 재능같은 게 아니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과 그 실행력을 유지시키는 근면함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긴데, 나는 굳이 그 뻔한 이야기를 다시 듣기 위해 이런 책들을 찾아서 읽는다. 비슷한 결론이지만, 그 결론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작가의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는 우리가 <오이디푸스왕>을 알고 있으면서도 <올드보이>를 보고, <오디세이아>를 알면서도 <라이프 오브 파이>를 관람하는 것과 비슷하다.
김연수 작가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은 김연수 작가의 이전 산문집인 <청춘의 문장들>의 연장선에 있는 산문집이다. <청춘의 문장들>이 제목 그대로 김연수 작가의 젊은 시절, 즉 청춘의 고민들을 이야기한 책이었다면, <소설가의 일>은 그보다는 좀 더 본격적인 소설 작문 가이드에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힘 없이 술술 읽히는 게 이 책의 매력인데, <청춘의 문장들> 못지 않게 김연수 본인의 사례를 재치있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문어보다는 구어에 가까운 책의 문체도 한 몫 거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매일 뭔가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맛이 획기적으로 나아지거나 갑자기 나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팥죽과 팥빙수와 햄버거 패티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세계는 오랜 친구처럼 늘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 스무 살의 내가 역전 근방에서 매일 몇편씩, 때로는 몇십 편씩의 시를 노트에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가게 주인들의 세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를 썼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역시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를 썼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겠지만, 난 왠지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라는 부분에 더 눈이간다.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다. 이만큼 ‘연습’이란 개념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다 어느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성장한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것은 작가의 성장을 의미한다. 성장의 순간은 커다란 희열로 다가온다. 이러한 에피파니를 경험한 이는 쉬이 그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래서 작가라는 족속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한다. 지금도 종종 떠오르는 대학시절 은사의 말씀이 있다. ‘뭔가 한 가지를 잘 하는 사람은 또 다른 무언가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시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던 그 말씀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를 잘 하는 사람은 이미 여러 번의 성장을 경험한 사람이고, 그 희열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잘 하고자 하는 일에 몰입할 줄 아는 사람이다. 꾸준히 정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재능’이라든가 ‘천재’같은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말들은 어딘지 모르게, 그 개인이 쌓아올린 시간과 노력, 성장의 과정을 가벼이 여기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분명 한 순간의 영감으로, 단 번에 써내려가는 작품도 있다. 김연수는 그렇게 쓸 수 있는 소설의 분량을 일생에 한 권으로 정의했다. 김연수는 소설가라서 소설로 예를 들었겠지만, 나는 다른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한 권의 책을 쓰고 난 다음은?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김연수가 언급한 L (long) S (slow) D (distance) 훈련법처럼, 매일 20매의 원고지를 작성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때까지 조금씩 걸어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