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이 책의 독자로서 꽤나 적격인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단어 그대로 나는 시를 잊은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의 내게 있어 시란, 관념적이고 현학적이며 재미없고 지루한, 하지만 그럼에도 대학진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만 하는 암기과목 같은 것이었다. 그 시절의 시는 주관적인 해석을 불허하며, 당연히 토론 역시 불가한, 최고 존엄이라 해야할까 신성 불가침의 영역같은 것이었다.국어 선생님이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이 조국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야만 했다. 그러한 이유로, 내가 겪은 교육환경에서의 시는 마땅히 잊혀질 만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이 세상에는 시 말고도 읽어야 하고, 봐야 하고, 들어야 하고,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나는 시를 잊고 지냈다. 내가 알고 있는 시는 시험을 위해 들여봐야하는 것들이 전부였으며, 그나마도 시를 감상했다기보다는 작품에 대한 해설을 달달 외웠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그렇게 시를 잊은 채 흘려보낸 시간이 어림잡아 10년이다.강산이 변하고 천지가 개벽할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이 책과 만났다. 책의 제목은 마치 나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읽기 쉽게 쓰여진 시 감상 지침서다. 저자는 각 장마다 주제별로 2편에서 4편 정도의 시를 소개하는데, 필요에 따라 시가 아닌 노래가사나 소설, 영화 등 다른 매체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짜여진 유연하고도 유기적인 구성은, 주제별로 묶인 서로 다른 시들이 마치 하나의 서사구조를 가진 연작들처럼 보이게 한다. 덕분에 시는 쉽게 읽히고, 해설은 이해를 더욱 폭넓게 만든다. ‘시’로 규정되지 않은 작품들도 시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줄 아는 저자의 포용력 덕분이다.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저자의 화제는 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 사회, 시대, 자연, 그리고 삶 전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확장해 나간다. 그렇게 확장되는 화제들 속에서 독자들은 자신들이 시만 잊고 있던 게 아니었음을, 다른 소중한 가치들도 함께 잊고 살아왔음을 조금씩 깨달아 나간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원래 시라는 문학이 그런 거니까. 사람을 이야기하고, 사회를 논하고, 시대에 하소연하며, 자연을 노래하고, 삶의 일부 또는 전부를 담아내는 문예를 우리는 시라고 부른다. 단지 그동안 우리가 시를 배워왔던 방식이 틀렸을 뿐이다.
끊임 없이 확장되는 화제 속에서, 이 책은 잊었던 것들을 일깨워 줄 뿐 아니라, 미처 몰랐던 것들을 알려주기도 한다. 우동 한 그릇’의 원래 제목이 ‘메밀국수 한 그릇’이라는 것이나 김소월이 딱 내 나이 무렵에 아편 과용으로 사망했다는 사실, 그밖에 시인들의 시시콜콜한 개인사와 가정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잡학스러운 대목들이 연거푸 등장한다.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잡지식을 주워가는 재미도 이 책의 결코 작지 않은 묘미다.
그런데 왜 하필 시였을까? 현대인들이 잊고 있는 것이 비단 시만은 아닐진대 왜 저자는 시를 읽으라 이야기하는 것일까. 책 114페이지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나 폴 포츠가 되고 인순이가 될 수 있다는 환상과 신화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희망을 노래하라고 권하고 싶다. 희망이 시가 되고, 시가 노래가 된다. 그리고 노래가 다시 희망을 준다.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름다운 꿈을 꾸는 사람들이라면, 출세하지 않아도, 돈이 많지 않아도, 병들어 늙어도, 정녕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우리라.”
흔한 자기개발서의 어줍잖은 꼰대식 감성팔이가 아니다. 저자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누구나 폴 포츠가 되고 인순이가 수 있다는 환상과 신화에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헬조선, 88만원 세대, N포 세대 등 온갖 부정적인 수사로 표현되는 오늘, 그러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도 결국 희망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자본가 혹은 정치인으로 대변되는 꼰대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그리고 그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시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하는 것 같다. 여기에 동의하고 말고는 독자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지지하고 싶다. 소설가 김영하의 강연 모음집 <말하다>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요컨대 사람들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대로, ‘글쓰기’로 대변되는 창작활동은 인간의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다.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그러한 활동들이 당장의 내 삶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하더라도, 바위에 낀 이끼처럼 서서히 삶 곳곳에 스며들어 어느 순간 나비의 날개짓과 같은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난 오늘도 바쁜 일상을 쪼개어, 서툴게나마 조금씩 글을 써보고, 그림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