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니 매트릭스 / [도서] 선량한 차별주의자

최근 워쇼스키 자매의 영화 <매트릭스>가 20년만에 재개봉되었다. <성경>에서부터 <장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다양한 레퍼런스를 폭넓게 차용한 이 영화는, 개봉 직후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적 담론을 이끌어냈다. 대표적으로 가상현실, 노장 사상, 불교에서의 윤회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런 다각적인 담론들 사이에서 의외로 많은 이들이 많이 간과하고 있는 논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매트릭스>의 세계관이 차별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다시말해, <매트릭스>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근거는 매트릭스 1편과 2편 사이에 공개된 <애니 매트릭스>의 수록작 <두번째 르네상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번째 르네상스>는 <매트릭스> 본편 이전의 역사를 다룬 프리퀄 애니메이션으로, 매트릭스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소 복잡한 줄거리이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고도화된 인류 문명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인조인간을 만들어 내었다. 인조인간의 개체수가 늘어나며 점차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이를 적대시하는 인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인조인간에 대한 무분별한 테러로 표출된다. 기계와 인간들의 갈등이 서서히 심화되는 가운데, 학대를 견디다 못한 로봇이 인간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살인을 저지른 로봇은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폐기처분을 받는다. 이 일을 계기로 로봇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가 열렸는데, 그 규모는 실로 엄청났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시위를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압하였고,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된 기계인류는 탄압을 피해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인간과 기계의 갈등은 사회문제에서 국제문제로 양상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기계국가는 뛰어난 기술력과 생산성을 바탕으로 인류의 산업경제를 순식간에 장악했고, 이에 인류는 경제제재와 무역봉쇄로 대응한다. 기계국가는 인류와의 공존을 모색하며 외교적 타협을 시도했지만, 인류는 결코 그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인간과 기계간의 첨예한 외교적 갈등은 곧 새로운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인간들이었다. 인류는 그들이 가진 핵무기를 동원하여 기계들을 공격했고, 개전 초기에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인류는 기계문명의 압도적인 기술력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고, 굴욕적인 항복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인류는 기계문명의 건전지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가 함의하고 있는 바는 명료하면서도 묵직하다. <매트릭스>의 디스토피아를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인간들 자신, 더 정확하게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편협한 차별의식이라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서 보면, 이 디스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은 <매트릭스> 본편에서 시스템을 상징하는 ‘요원들’이 전형적인 양복차림(화이트칼라)의 백인 남성들로 그려지는 반면, 저항세력인 느부갓네살 호의 승무원들이 다양한 인종과 성별을 가진 집단으로 그려지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차별에 대한 인식론적 물음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 속의 인류는 서로 반목하기 보다는 오히려 단합된 모습을 보인다. 특히 종반부의 기계문명과의 전쟁을 앞둔 대목에서는 모든 인류가 국가와 종교, 문화, 인종을 넘어 대통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들의 차별없는 화합이 또 다른 차별을 위한 것이라는 점은 매우 역설적이다. 즉, 차별이란, 우리의 인식 영역 바깥에서 벌어지는 행위라는 것이다.

위의 맥락에서, <두번째 르네상스>나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보며 떠올린 것은, 차별에 대한 문제는 어떤 행위보다는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대부분의 차별은 무관심이나 무지, 혹은 왜곡된 정보에 의해 발생한다. 바꿔 말해,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상당수의 차별을 극복해낼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다문화화 되어가고 있는 오늘, <매트릭스>와 같은 디스토피아를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 모두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도서] 앵무새 죽이기

이스라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는 “인간의 불행은 인류의 농업혁명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농사는 잉여식량을 만들어냈고, 잉여식량은 빈부의 차이를 만들어냈으며, 빈부의 차이는 계급갈등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다. 그런 맥락에서, ‘빈부격차’는 곧 ‘신분격차’와 상통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이 생겨난 이래로 인류는 항상 신분 상승을 갈망해왔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늘 적잖은 좌절을 겪기 마련이고, 그렇게 억눌린 욕망은 다시 이야기를 통해 표출된다. 이 때, 이야기는 훌륭한 대리만족과 정신승리의 수단으로 거듭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 속 부자(혹은 권력자)들은 대개 악하게 그려진다. 그래야 그들을 해치는 행위가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야기 속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착하다. 이같은 ‘나쁜 부자(권력자) 대 착한 약자’의 구도는 고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반복변주되어 왔다. 수차례 봐온 이야기임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나쁜 부자들이 쓰러지는 장면에 열광한다. 현실에서 느끼기 힘든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의 흥행은 이를 방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베테랑>은 매우 쉬운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선량한 노동자’와 ‘사악한 재벌 3세’, ‘정의로운 경찰’이 등장한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어떤 이야기인지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몇몇 장면에서는 실제 사건을 차용하여 일정한 현실감을 부여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정의로운 경찰이 사악한 재벌 3세를 때려잡으며 마무리된다. 우리는 이 영화가 전형적인 권선징악 판타지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에 빠져들고 열광하며 환호한다. 그런 일이 현실에도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1300만 관객이라는 이 영화의 스코어는, 대중들이 가진 열망의 크기를 대변하는 듯 하다.

한편, 박찬욱 감독은 중편 영화 을 통해, ‘나쁜 부자’와 ‘착한 약자’의 관습적인 구도를 뒤집어 버린다. 의 주인공 류지호는 재능있고 부유한 인기 영화감독이다. 그는 인품도 훌륭해서, 말단스태프에게도 결코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다. 어느 날, 그의 집에 괴한이 침입한다. 괴한은 류지호를 위협하며, 류지호에게 악행을 저지르라고 강요한다. 패닉상태의 류지호는 괴한에게 묻는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괴한은 대답한다. 나는 당신처럼 돈 많고 잘난 사람이 착하기까지한 게 마음에 안 들어. 황당한 범행 동기지만 관객들은 이내 수긍한다. 괴한은 오랜 가난으로 이미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독특한 관점은 메이킹 필름에 수록된 그의 코멘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은 너무 착해서 내가 견딜 수 없다’라는 그것이 출발이에요. 내가 살면서 잘 사는 사람, 부자들, 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을 더러 만날 때가 있는데, 옛날에 우리 부모 세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악독하고…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근데 요즘에는 아닌 거 같아요. 잘 사는 사람이 착하기도 한 경우가 더 많아요.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은 성격까지 더 삐뚤어지기 쉬운 세상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시작된 이야기죠.

최근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또한 이와 비슷한 발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약자 대 약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기생충으로 은유되는 영화속 빈곤층은,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는다. 영화 속 부자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악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애초에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고,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을 굳이 미워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이들은 기생충들의 싸움에 휘말려 희생되는 무고한 숙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약자 대 약자’의 싸움이 벌어진다. 선량한 흑인 톰 로빈슨은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 재판에 회부된다. 톰 로빈슨을 신고한 이는 밥 유얼이라는 이름의 백인 남성이다. 밥 유얼은 지독한 극빈층으로, 흑인 빈민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흑인들에 비해 나은 점은, 인종차별이 있던 시대에 백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뿐이다. 밥 유얼은 톰 로빈슨이 자신의 딸을 겁탈했다고 주장한다. 톰 로빈슨과 밥 유얼은 사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밥 유얼은 이를 부정하고 싶어한다. 그는 어떻게든 톰 로빈슨을 저 밑으로 끌어내려서, 적어도 자신이 흑인들보다는 나은 존재임을 증명하려 한다. 그에 비해, 애티커스 핀치로 상징되는 백인 지식인들은 오히려 톰 로빈슨에게 호의적이다.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어떤 것이 정의로운 행동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과 <앵무새 죽이기>가 보여주는 ‘약자 대 약자’의 갈등구조는 소름끼칠 정도로 현실적이고, 일상적이다.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대부분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직장 상사나 동료, 부하, 가족, 친구와의 갈등은 일상적이지만, 재벌총수나 대통령같은 사람들과의 갈등은 어딘가 비현실적이다. 갈등은 커녕, 애초에 그런 사람들을 한 번 만나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우리는 평생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반대로 주변의 누군가에게 미움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선과 악은 지극히 상대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톰 로빈슨과 밥 유얼의 모습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전에 자신의 발밑부터 먼저 돌아보길 권한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발이 다른 누군가의 등이나 어깨, 혹은 정수리를 밟고 있을지도 모를테니까.

[영화] 미스터 노바디 / [소설] 버스데이 걸

소설가 김연수는 자신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과거 = 안다, 현재 = 산다, 미래 = 모른다’ 라고 이야기했다. 즉, 삶이란 ‘모른다’에서 ‘안다’로 가는 과정이라는 이야기다.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라는 단어는 ‘가능성’의 유의어 내지는 동의어로도 활용된다. 우린 그 가능성 때문에 매순간 선택의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그 가능성이 최상의 형태로 발현되도록 틈날 때마다 소원을 빈다.

<미스터 노바디>의 주인공 니모 노바디는 천사의 실수로, 미래를 기억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을 앞두고 양친 중 누구를 따라갈지에서부터, 어느 여성을 배우자로 택할 것인지. 그 외에 크고 작은 부수적인 선택지에 이르기까지, 노바디는 자신에게 닥칠 수많은 경우의 수와 그 결과를 미리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알 수 있게 된 시점에서 그것은 더 이상 미래가 아니며 가능성 또한 남지 않게 된다. 결국 노바디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하던 시점으로 돌아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양자택일의 미래가 아닌 제3의 길을 향해 달려나간다. ‘모른다’에서 ‘안다’로 향하는 여정을 택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노바디의 현재 = 삶은 유의미해진다.

<버스데이 걸>의 ‘그녀’는 자신의 20번째 생일날, 자신이 일하는 레스토랑의 사장으로부터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앞서 말했듯 소원이란, ‘이상적인 미래’의 다른 표현이다. 그녀는 사장에게 소원을 빌었고, 사장은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녀가 사장에게 말한 것은 ‘시간이 걸리는 소원 = 먼 미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소원을 이야기했는지 화자에게 끝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바디가 가능성을 향해 제 3의 길로 나아간 것처럼, 그녀도 자신의 미래가 단정되어 버리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 버드맨

이 영화는 과거 헐리웃 히어로무비 <버드맨>의 주인공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지금은 잊혀진 퇴물배우 ‘리건(마이클 키튼 분)’이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재기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중년 배우 ‘리건 톰슨’의 성장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영화속 리건의 삶과 실제 마이클 키튼의 유사한 인생역정—마이클 키튼도 <배트맨>시리즈로 스타가 되었지만, 이후에 화제작이 없어 잊혀지고 말았죠—이 화제가 되기도 했죠. 다른 배역의 캐스팅도 꽤나 상징적인데, 실제 브로드웨이 출신이며 영화 <헐크>의 주인공이었던 에드워드 노튼이나, 영화 <킹콩>에서 브로드웨이 여배우로 나왔던 나오미 왓츠 등이 그러합니다.

개인의 성장담인 동시에 싸이코 스릴러를 방불케하는 묘한 긴장감은 어딘지 곤 사토시의 1998년작 <퍼펙트 블루>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2010년작 <블랙스완>을 연상케 합니다. 이 두 영화는 범죄물의 성격도 띄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다르긴 하지만요. 배우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실베스타 스텔론의 <록키 발보아>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 개개인의 이야기 뿐 아니라 배우들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에서도 여러가지 흥미로운 상징들과 풍자가 엿보이는데요. 버드맨으로 상징되는 헐리웃 히어로 영화의 공허한 상업주의, 괴팍한 배우 마이크와 평론가 타비타로 상징되는 브로드웨이의 배타성, 온갖 즉흥적이고 자극적인 포스트가 난무하는 SNS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위해 실제 배우, 감독들의 인명이나 영화가 수시로 거론되기도 하죠. 마이클 패스벤더의 이나 제레미 레너의 <어벤져스>, 마틴 스콜세지와 조지 클루니 등등…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론 그 중에서도 조지 클루니를 언급한 부분이 가장 인상에 남더군요. 최고의 배트맨이었던 마이클 키튼과 최악의 배트맨이었던 조지 클루니가 현재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과연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수훈은 역시 촬영과 사운드에 있습니다. 배우들의 동선을 따라가는 롱 테이크와 카메라를 따라 가며 울려대는 드럼의 비트는 스크린에 연극적 성격을 부여함과 동시에, 인물 심리의 발작과 분열을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속 극장의 복도와 분장실 장면은 세트 촬영으로 이뤄졌는데, 극 중 리건의 심리에 따라 복도의 폭이 좁아지거나 천장이 낮아지는 등의 공간 변형과 왜곡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제 막 3월이 되었을 뿐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올해 들어 본 영화 중 최고였네요. 다만, 생각보다 상영관이 적어 많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영화] 명장

<명장>은 홍콩 액션영화 거장 장철의 1973년작인<자마(刺馬:마신이를 찌르다)>를 베이스로 하는 영화입니다. <자마>는 청대 말기에 벌어졌던 실화를 다룬 영화로, 동치 9년 7월 26일 양강총독 마신이가 의형제인 장문상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살해동기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장문상이 처형당했기에, 이 사건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청대를 대표하는 미스테리 중 하나로 불리우며 호사가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살해동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역시 극화하기엔 치정극이 가장 그럴 듯했는지, 장철은 영화<자마>에서 치정에 의한 살인이라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일정부분 <명장>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진가신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시대적 고증을 반영하여 인물의 갈등관계를 보다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각색하였습니다.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가기 위해 주요인물의 이름도 ‘마신이’에서 ‘방청운’으로, ‘장문상’에서 ‘강오양’으로 개명해 버렸구요. 그리고 여기에 이 영화의 원제가 <명장>이 아닌 <투명장(投名狀)>인 이유가 있습니다. ‘투명장’이란, 의형제를 맺을 때 자신들과 관계없는 무고한 사람을 함께 살해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일종의 공범의식을 통해 유대를 강화시킨다는 의미가 담겨있는데, 이는 사실 상호불신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즉, ‘난 너를 못 믿겠으니까, 내 앞에서 살인해 봐라. 그럼 널 믿어줄께’라는 뜻이죠. 이렇듯 상호불신의 토대 위에 맺은 의형제라는 점에서, 세 주인공의 비극은 어느정도 암시되어 있던 셈입니다. 


영화에서도 투명장 의식이 나오긴 합니다만, 분량이 짧은 데다가 영화제목도 <명장>인지라 해당 의식에 대해 사전지식이 없는 관객은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된 감이 있습니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다소 생소한 단어라고 하더라도 원제<투명장>을 고수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부분이었네요. (이부분에 관해서는 영어 제목이 였던 점도 한 몫했다고 생각됩니다.)


뭔가 영화에 대한 설명과 주석이 장황하긴 했습니다만, 이래저래 중화권에서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묵직한 시대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영화] 족구왕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전반적인 코드는 ‘병맛’입니다. 과장되지 않게 소소한 웃음을 주다가도, 질러야 할 때는 과감하게 치고 나가는 감독의 유머 센스가 이 영화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습니다. <으라차차 스모부>나 <워터보이즈>, <스윙걸즈>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청춘 영화를 재밌게 관람한 분들이라면 이 영화도 재밌게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영화에서 ‘족구’는 단순히 구기 종목이 아닌 청춘의 메타포로써,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중적이지만, 메이저한 종목은 아니고, 또 때로는 병신같지만, 멋있기도 한 족구라는 구기 종목은 어쩐지 우리의 청춘과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영화는 족구를 큰 줄기로, 캠퍼스의 다양한 인간 군상과 사회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죠. 청년 실업, 등록금 인상, 학자금 융자 등 현 시대의 청춘들이 안고 있는 고민들을 툭툭 건드리면서도. 불필요하게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거나 신파로 빠지지 않습니다. 시종일관 경쾌한 분위기가 이 영화의 최고 미덕이 아닌가 싶네요.

정말로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보며 크게 웃어본 것 같습니다. 무거운 블록버스터 영화에 지친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네요. 소규모로 개봉한 작품이라 얼마나 극장에 걸려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

윤종빈 감독의 최신작<군도 :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는 <용서받지 못한 자>나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생시대> 등 사회고발형 작품의 형태를 취했던 감독의 이전작들에 비해 확실히 이질적인 작품입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B무비에서 강한 영감을 받은 액션영화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영화 곳곳에서 B무비의 연출기법이나 장면을 차용한 흔적이 역력하며, 사운드 역시 마카로니 웨스턴 느낌이 강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군도>는 제법 호불호가 갈릴 법한 영화이며, 실제로도 호불호가 분명한 영화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감독의 전작들과 이질적이란 부분도 관객의 감상에 큰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죠. 나름 시대극에 현실사회를 대입해보려 한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기도 합니다만, 아무래도 전작들에 비해 부족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냥 통쾌한 액션영화라 생각하고 보는 편이 속 시원합니다. 타란티노나 로드리게즈의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그럭저럭 즐기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윤종빈 감독에 걸려있는 기대가 꽤 크긴 하지만, 윤종빈이란 이름을 지우고 이 영화를 바라보면, 사실 <군도>는 꽤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어느정도 B무비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윤종빈 감독이 가진 B무비에 대한 장르적 애착을 느낄 수 있으며 ‘윤종빈 감독이 이런 영화도 만들 수 있구나’하는 신선한 발견을 선사하기도 합니다.이래저래 이견이 많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꽤 재밌게 봤네요.

[영화]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정석적인 SF의 스토리텔링을 답습했던 이전작과 비교해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은 제법 독특한 영화입니다. 아니, 전작을 포함한 이전까지의 SF영화들과 비교해도 제법 특이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일반적인 SF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본 영화도 CG기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CG 캐릭터로 눈요기하는 수준을 넘어 CG 캐릭터들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실사 배우들이 등장함에도 그 비중은 조연 이상으로 생각하기 힘듭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유인원들의 정치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그 사이에 끼어 양념역할을 하는 형국이죠. 주된 줄거리는 어떻게 인간들과 유인원들이 반목하며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실제처럼 움직이는 유인원 CG 외에, 곳곳에 숨어있는 미장센을 찾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유인원 소굴 입구에 있는 ’76’이라 써있는 간판이나(그러고 보니 포스터도 어쩐지 미국 독립전쟁을 모티브로 한 거 같네요.) <킹콩>의 마지막 시퀀스를 오마주한 듯한 종반의 타워 격투씬 등은 영화감상에 소소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마이클 베이의 신작 <트랜스포머4>와 여러모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모를 보이는 작품이 아닌가 싶네요. 나날이 발전해가는 헐리웃의 기술과 시나리오에 경외와 기대를 품게하는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영화] 그녀 (Her)

씨네21의 이후경 기자는 이 작품을 두고 이렇게 평했습니다.’시리 농담의 끝판왕’.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한 비평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들 아시듯 이 작품은 인간과 OS의 사랑을 다룬 작품입니다. 앞서 말했듯 짖궂은 농담같은 시놉시스죠.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실없는 농담에서 머물지 않고, 오히려 여느 멜로물보다 진정성있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이 영화가 꽤나 치밀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혼이라는 주인공 테오도르의 개인사에서부터 음성인식으로 컴퓨터가 모든 업무를 대행해주는 미래사회라는 배경, 잠들기 전 컴퓨터가 주선해주는 폰섹스 등등… 이 영화에서 주인공과 OS의 사랑을 설득력있게 만드는 장치는 꽤나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얽혀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설정은 손편지대필작가라는 주인공의 직업입니다. 가족, 연인 등 소중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쓰지 않고 대필을 의뢰하는 사회, 더 나아가 손편지대필 대행업체가 있을 정도로 이런 모습이 일반적인 풍토로 자리잡은 사회란 설정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사람보다 인간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핵심적인 장치입니다. 이런 피상적 인간관계가 보편화된 환경에서, 주인공이 사람이 아닌 OS에 진심을 털어놓는 모습은 얼핏 우스워보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웃기엔 어딘가 슬퍼보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얼굴없는 여주인공 ‘사만다’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이는 일전에 단체관람했던 영화 <트랜센던스>와 여러모로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장 큰 비교포인트는 <그녀>의 ‘사만다’가 본래부터 인공지능, <트랜센던스>의 ‘윌’이 본래부터 인간이었음에도, 사만다가 윌보다 더 인간적인 사유를 한다는 점입니다. 윌보다 더 인간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자신이 실재하는 인격인지 아니면 단순한 프로그램에 불과한지 고민하는 사만다의 모습은 그저 신처럼 군림하려하는 윌의 모습보다 인간적일 뿐 아니라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이 영화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과 OS의 성생활이라는 소재에까지 접근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민망함을 줌과 동시에 여러 담론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인공지능이 되고 2년이나 지나서야 타인의 몸을 빌려 아내에게 ‘이제 당신을 만질 수 있어’따위의 대사를 읊조리는 윌과 여러모로 비교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차 말했듯 일견 말도 안되는 시놉시스를 ‘말이 되게’ 하는 데에 시나리오 못지 않게 배우들의 열연이 큰 몫을 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이동진 평론가는 목소리로 ‘사만다’를 열연한 스칼렛 요한슨을 두고, 그녀의 모든 연기를 통틀어 최고였다고 평했는데, 개인적으로도 크게 공감합니다. ‘테오도르’로 멋지게 원맨쇼를 연출한 호아킨 피닉스는 포스터에서 보이듯 이 영화의 얼굴 혹은 이 영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

아직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보지 않은 상태라 함부로 단언하기 힘들지만, 개인적으로 올해 이때까지 개봉한 작품 중 가장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참신한 요소가 사실상 전무함에도 이 정도의 완성도와 재미를 이끌어 냈다는 점이 놀랍기도 하네요.

영화의 기본적인 플롯은 <소스코드>와 유사합니다.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하루를 리셋하는 톰 크루즈의 모습은 <소스코드>의 제이크 질렌할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죠. 극 초반 프랑스 상륙작전의 모습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오버랩됩니다. 외계인과 싸우는 군대라는 설정은 <스타쉽 트루퍼스>와 상통하죠.장착하는 기계수트는 이미 <아바타>에서도 클리셰로 느껴졌을 정도로 SF에서 흔한 장비입니다. 톰 크루즈와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라는 점에서 <우주전쟁>을 연상한 분도 계실지 모르겠네요. 이렇듯 이 영화에서 참신한 요소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재미가 있습니다. 약간의 설정 오류도 눈에 띄지만, 진지하게 걸고 넘어가지 않으면 그냥저냥 수긍하고 봐 줄 있을 수준입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단 재밌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건 연출입니다. 끊임없이 루프하는 상황임에도 관객들이 지겨워하지 않게끔 필요한 부분만 보여주는 편집이 수준급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소요소에서의 위트도 놓치지 않죠. 한마디로 말해 정말 잘 만든 헐리웃 SF 오락 영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소 박한 평가로 보일런지도 모르겠으나, 이 정도의 기준에도 부합하지 못하는 영화가 천지에 널렸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나쁘지 않은 평이라고 생각되네요. 개인적으로는 ‘역시 톰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새삼 되새기게 해준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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